[7성사에 녹아 있는 사회교리] 

(가톨릭마산 2015.9.20.)


안 한 죄로 심판받을 인류 (고백 )


사형언도를 받고 형장에 끌려가면서 내 죄를 인정하는 한 마디로 형을 면한다면?” “‘잘못했습니다.’는 한 마디로 무기징역의 이 감방에서 당장 풀려난다면?” “'그때 그 짓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하는 후회만으로 무혐의를 받는다면?” 창살 속의 수인들이 새벽마다 꾸는 꿈이 아닐까? 성당 고백실에서 바로 그런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가톨릭 신앙의 가장 큰 특전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고 사제 앞에 고백하는 것만으로 하느님께 사죄와 구원을 받는 일이다!


생각과 말과 행실이나 궐함으로 천주께 지은 죄를 자세히 생각하고 그 중에 습관된 것을 살피게 하소서.” 고백실에 다가갈 적마다 염하는 기도문이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미사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세상의 종교들 가운데 저지른 사언행(思言行) 말고 궐한 죄’, ‘소홀한 죄’, 안 한 죄를 두고 하느님께 용서 비는 곳은 그리스도교뿐이리라. 우리가 주님으로 받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전 인류에게 멸망이냐 구원이냐를 한꺼번에 판결하시는 최후심판의 자리(마태 25장에 아주 뚜렷하게 예고되어 있다!)에서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는 저주는 안 한 죄에 떨어진다.


너희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이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답니다.’ 라든가, ‘전 세계 4000만 난민들은 우리 우방국들이 만들어 냈다니 어쩌겠어?’라든가 빨갱이(요새는 종북‘)는 씨를 말려야죠.’라는 변명이 지엄하신 심판자께 통하면 좋으련만....


신앙의 성장은 죄에 대한 감수성에 있다고 한다. 교회의 가르침대로 사회적 죄를 의식하고 가슴을 치는 일은 탁월한 영적 성숙이다. “인간관계에 합당한 정의에 거슬러 자행되는 모든 죄”, “이웃의 존엄과 국민의 모든 권리와 공동선의 요구들을 짓밟는 모든 죄”(화해와 참회[1985] 118)를 통회하고 물과 토양과 공기를 오염시키는 죄”(찬미받으소서[2015] 8)까지 성찰하며 고백실로 들어가는 이는 어른다운 신앙인이다.


신곡(神曲)에서 지옥을 순례한 시인 단테는 불구덩이 지옥 저 밑바닥에서 사탄의 두목 루치페르를 본다. 그자는 (불꽃 아닌) 얼음 속에 허리가 갇혀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중립을 지키는 사람”, 국가안보니 반공이니 하는 이념의 가면 뒤에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일수록 교회의 사회복음을 철저히 냉소하는 까닭을 알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