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와 솔개미

 

                                                                 "지리산人" (2012.8)


지리산 권역의 활동가들이 "지리산人"이라는 부정기 간행물을 내고 있다. 일년에 한번씩 차례가 돌아와 짧은 단상을 실어왔다. 


뱁새가 솔개미 발톱에 채였다. 뱁새는 울고 하소연하고 욕하고 발버둥쳤다. 솔개미가 하는 말. ‘너는 일단 내 발톱에 걸렸어. 널 잡아먹을 건지 놓아줄 건지는 내 맘에 달렸어. 단 그때까지 울부짖을 권리는 너한테 있지." 이것은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문인 헤시오도스의 우화시 한 토막이다.


1979년 추석날 한밤중이었다. 우이동 골짜기에 있는 우리 집 초인종을 누가 눌렀다. 건장한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엉겁결에 옷을 차려 입고 내가 대문을 열어주자 “6국에서 나왔소라는 말과 함께 두 사내가 다짜고짜 내 옆구리를 껴안고 팔을 비틀었다. 골목 끝에는 검은 세단이 기다리다 나를 싣고서 남산을 향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당시, 서울 밤 거리에 그토록 많고 그토록 삼엄한 검문소가 있다는 것도 처음 보았지만, 자정이 넘어 간첩처럼 정보부 차량에 쑤셔 박힌 채로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는 나는 무슨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심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부마사태'로 정권이 위태로워진 박정희가 또 한 차례의 '인혁당사건'을 조작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 중이어서 '민청학련'의 학생 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여 조사하던 중이어서 그해 10월 남산지하실은 밤낮없이 몽둥이질과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인간도살장 분위기였다. 생전 처음 공포라는 것이 나를 휩쓸었다.


옆방에서 들리는 비명, “네까짓것 하나 쯤 죽어 나가도 세상이 눈 하나 꿈적 안 해.”라는 협박, 진술서를 하루마다 다시 쓰게 하고 시키는 대로 받아쓰지 않으면 주먹이 날아오던 한 달 간 나는 앞서 인용한 헤시오도스 우화의 뱁새 신세 그대로였다. 나야 손가락이 끊어져도 진술서에 지장을 안 찍고 버티거나 법정에서 고문을 당했노라고 외칠 수 있겠지만 판검사들이 사법살인의 하수인 행세를 하던 시국인지라 살고 죽는 것은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절감하였다.


솔개미 발톱에 걸린 뱁새가 되어 부당한 조작과 고문에 대한 분노, 고문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내가 무엇으로 버텨낼 수 있었을까? 일제시대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조국 분단 임시에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그리고 5.16반란군 하에서 국민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이 강산 언덕에 줄줄이 세워진 십자가 형틀과 그곳에 매달려 죽어간 의사(義士)들의 기나긴 행렬에 감히 나도 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을까?


하지만 1024일 밤이었던가? 며칠째 잠을 안 재워 정신이 흐릿하고 안경도 끼지 못한 내 눈 앞에, 훗날 사진으로 본 김재규씨가 나타나 조사관들의 보고를 받고 가더니 26일 새벽 우리 형제는 남산 대공분실의 철문을 나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김재규씨는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쏘았다.


크게는 인권이니 민주화니 조국통일이니 하는 명분에 동조하는 이들, 가까이는 지리산 둘렛길을 걷는 가난한 행복을 사랑하는 이들, 대청봉과 백운대와 노고단에서 긴긴 세월 비바람 속에 소리 지르던 사람들, 당국자와 이기적 주민들의 고함과 주먹질과 협박을 견뎌내는 지리산인()들 역시 산에 대한 사랑 하나로 온갖 시련을 이겨가리라. "사람이 빵 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격언을 몸으로 살고 있어서 그이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