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

[지리산 2018.4.23]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

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

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

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

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 (이상국, ‘산그늘’)


칠순도 반고비를 넘겨 돛 감고 닻 내릴 날을 내다보면서 산그림자가 휴천재까지 내려오는 해거름이면 유난히 서늘한 맘이 일면서 내 눈길도 건너편 와불산 넘어 지리산 하봉으로 더듬어 올라간다. 소년시절을 보낸 내 고향 장성 삼서의 소룡리에서도 멀리 불갑산에서 노을이 스러질 즈음이면 내 어린 눈길이 늘 산그늘을 향하곤 했다.


사변 전에도 100호 마을을 이루었다는 소룡리가 하룻밤에 시커먼 폐허로 변해버렸다. ‘여순사건의 여파였다는데 마을은 불타고 남정들은 시체가 되어 누웠다. 동란이 일어나고 서울수복이 이루어지자 이번에는 국군 11사단이 들이닥쳐 마을마다 남녀노소를 수십 명씩 학살하며 지나갔다. 일제부역 세력에 장악된 군경은 오늘까지도 국민을 학살하는 병기일 따름이지만, 좌우이념대립은 일찌감치 내 머리에 깊숙한 상흔을 남겼다.


30여 년 전, 기독교인권위원회가 김인서라는 노인을 우리 가족과 맺어주면서 35년간 옥살이를 한 비전향장기수라고 소개하였다. 6.25 전쟁이 나면서 한 살 나이로 헤어진 작은딸이 내 아내와 동갑이라며 우이동 우리 집을 간간이 찾아왔는데 저녁나절 인수봉 산그늘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은 늘 서늘하였다. 2000년에 북송되기 전날 밤도 우리한테서 묵어갔지만 2008사제단과 함께 우리 부부가 평양을 방문한 길에 물으니 그해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이었다. 두 딸과 생애 말년을 보내며 그 눈길이 따뜻이 감겼기를 빌었다.


선상님, 어디 가시오?” 

문정 갑니다.” 

문정리라꼬? 말씨가 거기 사람 아닌데?” 

귀촌해서 그 동네 삽니다.” 

거기 이아무개 있는데.” 

이선생님은 윗숯꾸지에 사는 분인데 돌아가셨지요” 

하갸, 조합장하던 거기 강아무개도 죽었지. 내 초등학교 동창들인데.” 

함양읍에서 마천으로 가는 군내버스에 탔다 술이 거나한 영감님을 만나 나눈 얘기다.


그러다 돌연 영감님 화제가 바뀌었다

선상님, 나 사람 아니요." 

"???" 

"나 대한민국 육군대위요. 내 나이 여든 일곱이오. 나 사람 아니요. 보도연맹이라고 잡아 오면 다 쏴죽여 뿌렀소. 졸병이든 장교든 대령이든 그 짓 하고선 사람 아니요." 

"......" 

"딸은 나더러 이런 말 지발 입 밖에 내지 말라카지만... 선상님, 나 사람 아니요.”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고백은 나에게서 아무 위로도 못 받은 채로 노인은 대포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허리를 펴고 지리산 쪽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길이 서글프리만치 서늘했다.


촛불혁명으로 적폐를 청산할 소임을 받은 문대통령은 대포마을 저 노인의 양심을 누르는 묵직한 돌을 치워준다는 명분에서도, ‘보도연맹이라며 학살당한 25만 명의 유가족의 한을 풀어주는 뜻에서도 과거사위원회를 다시 설치 가동해야 한다. 천왕봉 산그늘을 바라보는 숱한 눈들의 서늘한 눈망울들을 노고할메의 쭈그렁 젖을 만지며 포근히 감겨줄 때가 왔다. 이념대립으로 상채기가 여직 생생한 사람들에게는 남은 날이 적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