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리의 죽음들

글 성 염(본지 자문위원)

 [지리산人 2019.5.13]


  필자가 지리산 서북자락 문정리에 ‘휴천재(休川齋)’라는 누옥을 지은 것이 25년 전이고 주민등록을 옮겨 주민으로 살아온 것이 10여년 되는 사이 문하마을 남정들은 대부분 세상을 떴다‘조합장’,‘부면장’‘노인회장’ 등 직함으로 불리던 노인들도‘동호양반’‘거문골양반’‘용산양반’ 등 부인의 택호로 불리던 사람들도또 혼자 사는 아짐들의 상머슴 노릇을 해주던 맘씨 좋은 ‘인국이 아재’처럼 수줍던 사람도 세상을 등졌다내 또래 서넛이 아직 살아 있을 뿐.


  아낙들은 열댓 남았지만 남편의 마지막 몇 해를 치매병간으로 보내다 떠나보내고 나면 ‘안방 아랫목에 누웠으나 앞산 양지에 옮겨 누우나 매한가지’라는 초연한 얼굴을 하고서서까래 내려앉는 집에 혼자들 살면서 대처로 살러나간 아들 손주 소식으로 연명한다대개 산비탈에 묻히지만 손수 쟁기질하던 밭에 묻히기도 하여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이생진“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는 구절도 맞힌다.


  휘영청 보름달이 아스라한 밤중에 잠을 깨면 필자는 하봉 쪽 문장대를 창밖으로 올려다보면서 “다람쥐처럼사랑 때문에산에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생진 “행복한 사람”에서)을 그려본다우리 민족이 거쳤던 아픔에서도 사상과 이념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어느 편에 섰든 존경이 가는 까닭에 저 능선에서어둑한 골골에서 봉분 없이 스러진 이들이 긴긴 행렬로 만가(挽歌)를 부르는 듯한 환청도 들린다내가 사는 문정리 앞을 휴천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는 송문교 옆에는 문장대 일대 산허리를 안내한다면서 ‘빨치산 루트’라고 기록한 간판이 여러 해 서 있었기 때문이리라.


  작년 8월이던가견불동 사는 조감독이 잠시 들러 냉수나 한 잔 마시고 가겠다고 전화하더니 시간이 되니까 ‘토벌대를 피해 도주하는 산사람들행색을 한 일행 열두 명이 나타나서 삽시간에 휴천재를 접수했다우리 분단의 역사를 현장답사로 배우는 젊은이들이란다무리를 인솔하던 분은 한때 우리 부부와 친분을 나눴던 김인서(본명 김국홍노인을 직접 알고 있었다우리 동네 문정리가1950년 말 남로당 유격대가 조직되고 출정한 곳이라는 연구발표가 있어 그 장소를 확인하러 다닌다 했다.


  심심산골에 문정리(文正里)라는 지명도 귀에 설지만우리 집에서 100미터가 안 되는 거리에 고려조 이억년 선생의 묘소가 있고그가 문정리에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사람을 가르친 내력이 ‘도정마을’이라는 이름에 남아 있다도정마을에는 일제하에서도 한지공장이 있어 그 자제들이 배우고 깨우친  민족주의자들이었는데 보도연맹으로 싸잡혀 희생당했다는 소문도 있어 그들의 추정도 제법 신빙성 있어 보인다.


  거창과 함양-산청 양민학살을 자행한 11사단 최덕신의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가 1951년 28일 아침 9시에 개시된 마을이 이곳 문정리였다는 점도 시사점이 있다‘시국강연’을 한다면서 논으로 끌려나온 주민 200여명이 국군의 기관총에 학살당할 찰나에 강경한 항의와 설득으로 사람들을 살려낸 당시 이장 김길동(金吉童)의 송덕비가 문하마을 초입에 서 있다필자가 이 동네로 살러 와서 장례를 치른 노인들은 저 운명의 날 10대의 소년들이었지만 필자에게 그 날 얘기는 한번도 안 꺼냈다바로 그 이튿날 첫애를 해산했다는 90대 여인의 눈초리에는 70년 지난 지금도 군경에 대한 깊은 공포가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