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교구 "빛고을" (1977.10,16)

"무식한 프로테스탄트"

 

                                                        -빵기 엄마

 

 

난생 처음 전라도 광주를 찾았고 "팔자에도 없는"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다. 팔자에 없는 건 그뿐만 아니었다. 장로님 집안에서 낳고 자라서 프로테스탄트 학교에서,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배우던 내가 "구교"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성세를 받으시겠습니까?"

"천만에요. 저는 이미 세례를 받았는 걸요."

"그러면 애들이라도 태어나면 가톨릭신자로 만드시겠습니까?"

"글세요. 본인들이 원한다면야 어쩔 수 없죠. 신앙의 자유는 헌법으로 정해진 거니까."

".... ...."

이 정도로 그분은 우리 혼배성사를 아주 각별히 생각하여 봐 준다는 식으로 치뤄주셨다.

 

대신학교 적에 붙여졌다고 우리한테 자랑하시던 당신의 별명처럼 말보다 더 말다운 그분의 모습을 보면 다솟곳이 미사를 드리느니 보다 장난기 어린 생각에 딴전을 보는 수가 많았다. 타고난 눌변에다 광경 하나하나그 나마도 부족한 나의 경외심을 더욱 괴롭히곤 했다.

 

그 중에도 우스웠던 일은 성체를 영하고 난 후 교중 앞에서 설거지(?)까지 하시고,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하겠는데) 물로 헹궈 국물까지 마시는 비위생적인(?) 광경에는 아연하였다. 언젠가 그분께 본인의 졸견을 말씀드렸더니 "이 무식한 프로테스탄트의 말씀대로 나도 언젠가 부엌에 가서 행주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할 때가 올 거요."라고 하셨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게 이상해서 자꾸 가까이하고 보게 되면 문명의 침식을 당하는 법이다. 이상야릇하고 낯설었던 광경에 차츰 친숙해졌고 그분의 강론에서도 언변보다는 정말 무언가 들려주어야 되겠다는 꾸밈없는 열성에 차츰 사로잡히게 되었다.

 

매주  돌아가는 반상회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고 나이든 아주머니들 틈새에 "청일점"이 되셔서 무릎이 시도록 열심히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시던 모습은 내 가슴에 무언가를 심어주었다.

 

또한 동양화"를 유난히 즐겨 동양화 마흔 여덟 폭만 잡으시면 자리를 뜰 줄 모르던 분이었다. "늦으셨어요. 12시 4분전입니다. 그만 가셔야죠." "여기가 좋으니 쫓아내진 마시구려." 그렇게나 사람을 좋아하는 분을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 방범대원의 호위를 받으며 어둑한 사제관으로 들어가실 모습을 떠올리며 모르긴 하지만 내가 가졌던 그 애잔한 감상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첫아기(빵기)를 낳으러 대학병원에 가기 전날, 기분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가지 사연을 남겼었는데 그분께 드리는 메모도 있었다. "신부님, 그 짧았던 시간에 생소했던 가톨릭을 낯익혀주신 분, 그 사랑어린 열성만은 누구의 마음 속에도 한 알의 썩어진 밀알이 될 것입니다...."

 

 

 

 가정방문을 하시어 미사와 빵기세례를 베푸신 김신부님

 SCX-46.jpg * 1973년 월산동 성당에서 우리에게 혼인성사를 집전해주신 신부님은

은퇴하여 저 완도 바닷가 "수강재"에서 묵상에 여념 없으신 김성용 신부님.

 

5.18 때 시민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결연히 나서셨고

그로 인해 오래 옥고를 치르신 분이다.

 

2013년에는 서품 50주년(금경축)을 맞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