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1일 금요일, 흐리고 썰렁했다

 

송화 가루가 눈보라치듯 이쪽 산에서 저쪽 산으로 놀러다닌다. 학교 파하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면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떼지어 가듯 누런 먼지들이 바람타고 도저히 예측 못할 방향으로 휘날려간다. 요 며칠 새 내 자동차는 노랑 옷을 폼 나게 걸쳐 입었고 뒷마당 나무계단이며 앞 테라스 나무 책상도 노란 분을 잔뜩 발라 화장한 채로 누굴 기다리나보다. 엊그제 한두 방울 떨어진 비에 동그랗게 방울방울 군데군데 도드라져 있는 모습 또한 사랑스럽다.

 

11시경 “가톨릭 지금 여기”에서 한상봉씨가 보스코의 지리산생활과 댐반대 운동을 취재하러 왔다. 둘이는 테라스에 앉아 지리산에서 행복한 나날들, 자연(自然) 그대로 보존되어야 할 가치들, 댐을 만들며 그들이 벌이는 총체적인 탈법과 불의, 이대로 가면 우리에게 닥칠 암담한 미래를 진솔하게 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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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우리 집 찾아온 손님에게 봄의 향기를 맛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나는 곰취, 곤드레, 참취, 방풍, 아카시아꽃을 색과 향을 살려 채반 가득 전을 붙여냈다. 그는 “시골에서는 연한 풀잎이면 몇몇 소문난 나쁨 놈을 제외하고는 다 먹어도 된다.”면서 맛있게 먹었다. 몇 해 전까지 귀농생활을 했었고 나름대로 새로운 삶을 추구했던 사람이어서 시골의 밥상 맛에 찐한 향수를 갖고 있었다.

 

1시반경 보스코와 그는 송문교 다리를 건너 용유담까지 가면서 문정댐이 건설될 장소가 얼마나 아름다운 명승인지, 왜 우리가 망가뜨려서는 안 되는지, 자자손손에게 물려줄 얼마나 소중한 자연유산인지를 눈으로 보고 사진을 찍으면서 실상사로 갔다.

 

보스코는 2시에 도법 스님과 의논하러 가는 길이었다. 아침 내내 전화로 사태를 다잡아가던 그로서는 도법 스님과 대책을 두고 대강의 윤곽을 잡았으리라 본다. 큰 판에서 일을 해 온 도법 스님은 내공이 대단한 분으로 누구도 따라가기 쉽지 않다. 어제 유명사찰 주지들이 호텔에서 억대의 도박을 했다는 뉴스가 터졌는데 오늘 누더기로 기워진 도법스님의 법복을 보면서 “자발적 가난이 인간을 얼마나 자유스럽게 하는지” 머리가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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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 얘기가 잘 풀렸는지 보스코는 한상봉씨를 실상사에서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마천에 새로 생긴 “둘레길자락길”을 걷자고 스스로 나섰다. 기암괴석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저 람천의 물줄기.... 댐을 만들면서 저 자연석을 모조리 긁어내갈 작자들의 탐욕을 생각하니 정말 속이 끓어오른다. 산길을 오르다 모심기 써레질을 하는 아낙, 모판을 나르는 아저씨들, “나도 처녀 적엔 겁나 예뻤는데 이젠 쭈구럭 바가지”라면서 카메라 앞에서 함박 웃는 아줌마와 인사를 나누면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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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락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며칠 전 파비아노 선생님이 모처럼 이 골자기에 까페가 생겼다며 반기시던 커피점 “길”에 들렀다. 사이좋은 남녀 친구들이 꾸미고 가꾸어가는 그 카페에는 음악도 있고 커피도 있고 인정도 있어 생강차를 한 잔씩 마시면서 주인들과도 정담을 나누다 돌아왔다. 처음 만남이라고 오늘은 우리한테 공짜로 차를 대접했다.

 

인월에 카페가 있는지 모르지만 산내, 마천, 문정, 유림, 화계까지 음악이 고픈 사람들이 함께 만나 가슴을 열만한 자리가 단 한 군데도 없었는데.... 주변의 한량들에게는 반가운 “개구리운동장”이 되겠다. 이 물논에서 물을 마시면서 개골개골 실컷 담소하는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시골 다방의 그 어둑하고 담배냄새로 찌든 공간이며, “티켓” 판매로 음습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곳이 생겨서 좋다. 얼마 전 우리 집 전기와 계량기 문제를 해결해 준 한전 김과장까지 그 카페를 찾아주어 한곳에서 많은 일을 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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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마천에서 자장면과 짬봉을 한 그릇씩 먹는 외식을 하고 나니 밤이 늦어버렸다. 늘 일에 쫓기던 보스코가 오늘은 나에게 시간을 많이 썼다. 그래서 피곤했는지 보스코는 아홉시도 못되어 꿈나라로 떠났다. “지리산휴천재일기”의 꼭지 번호에 따르면 999꼭지의 일기를 쓰는 이 시각에도 오늘 둘러본 산자락과 맑은 강물과 그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래, 너희 고이고이 거기 그대로 있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