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5일 목요일. 날씨 맑음

 

새벽 7시면 벽난로 속에서 닭이 운다. Made in China  알람시계인데 닭소리를 내는 것이라 여러 해 동안 사용해 오고 있다. 처음 우리집에 오는 사람들은 집 가까운 어디에 우리가 닭을 키우는 것으로 생각한다. 로마 대사관저에서도, 휴천재에서도 "알람 닭"은 새벽마다 잘도 운다.

 

이 시간에 눈을 반쯤 뜨고 머리맡의 전화기로 엄마한테 전화를 한다. 날마다 이 시각은 엄마에게 전화하는 시각. 엄마는 늘 기다리고 있는지 전화벨이 한번만 울리면 곧 받는다. 요 며칠 간 손님이 많아서 한 사흘 전화를 못했는데, 엄마 말이 어제 호천이가 올케랑 다녀갔단다. "아차, 엄마의 생신인데 축하인사도 못드리고 넘어갔구나!" 뜨끔하였다. 음력 9월 17일은 엄마의 생신인데 선물은 커녕 전화도 못 드리고... 엄마도 어지간히 서운하셨던 음성이다.

 

내 전화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88세의 엄마에게 큰 소리로 어제 한 일, 오간 사람, 날씨 등 평상의 얘기를 해드리는 내용이다. 날마다 같은 얘기지만 엄마는 언제나 새벽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계시므로 하루도 빠뜨릴 수가 없다. "엄마, 사랑해!" "나도 너 사랑한다." 둘의 통화는 이 인사로 끝난다. 딸 전화를 받아야만 안심하고 "유무상통"(방상복 신부님이 운영하는 양로원 이름. 그 집의 가훈은 "놓아라!") 식당으로 내려가신다. 아. 기분 좋아라! 이렇게 내 하루가 시작한다.

 

어제 진이네 냄비를 태운 댓가로 오늘 오전에는 한 시간 가까이 팔목이 부러져라 냄비를 닦았다. 그래도 예전의 광택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남자들이 뭐라고 안해도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충분한 보속을 하는 셈이다.  

 

11시에 소나타에 헤드빅 수녀님을 모시고 진주 경상대 병원엘 갔다. 한 시간이나 기다린 후, 겨우  5분 가량 담당의를 만나고, 석 달치 약 처방을 받고, 내년 2월 4일자로 진료예약을 하는데도, 돈을 내겠다는데도 다시 한 시간을 기다렸다. 또 처방전을 들고 약을 타러 약국에 가서도 30분을 기다리고 나니 오후 2시 반이 되었다. 지난 번에는 글라라씨와 체칠리아씨가 수녀님을 모시고 다녀왔다.

 

수녀님과 나 둘이는 VIPS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먹을게 이것저것 많았지만 점심시간이 늦어 너무 성급하게 먹는 바람에 곧 배가 불러왔다. 오늘은 헤드빅 수녀님이 쐈다. 수녀님도 서양음식을 보고 좋아라 하는 품이 귀엽기도 하다. 한국에 살면서 40년 가까운 세월이라지만 자기 나라 음식에 대한 향수는 누구도 잊지 못하는가 보다.

 

진이 엄마가 부탁한 고무장갑을 찾느라 또 한 시간 진주 바닥을 헤매다가 장을 보고 집에 오니 저녁 6시가 다 되었다. 집에 와서 보니  고추 서리걷이 해서 다용도실에 며칠째 놓아둔 고추나무에서 고춧닢과 고추들을 거의 다 보스코가 따 놓았다. 그의 말대로 하면 "가사를 돌보는 틈틈이 집필을 한다."는데 상당한 엄살이다. 이것저것 집안일을 시키면, 요즘은 스테파노씨한테서 배웠는지, "머리꼭지가 뜨뜻해진다."면서 짜증을 낸다.

 

7시쯤 되니까 감상자를 싣고 진이네가 도착했다. 오늘 곡성까지 감 가지러 두 탕을 뛰었단다. 어제는 밤 한시까지 껍질벗긴 감을 걸었다는데 또 새벽같이 감 가지러 트럭으로 떠나는 "꿀벌부부"를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지만 내 친구들한테서 시골에서 심심해서 어찌 사느냐는 걱정을 들으면 나는 "여기선 심심할 새가 없어."라고 대답하곤 한다. 어제 전화한 김교수네 가타리나씨는 이제는 오히려 서울이 답답하고 심심해서 못 견디겠단다. 남편한테 이번 한 학기로 학교를 끝내고 아주 시골로 내려가 살자고 조르는데 뜻대로 받아줄지는 미지수란다. 가타리나씨가 "남자들은 왜 뭘 그렇게 모를까요?"라고 물어오는데 나도 답을 모르겠다.

 

남자와 여자 사이는 많은 사실을 두고 별세계에서 온 외계인들처럼 안 통하고 납득 안 가고 담벼락에 부딛친 것처럼 답답한 경우가 오죽이나 많은가? 결혼 생활 3, 40년 되면 우리 여자들은 남편들(아들들까지도)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처럼 자신만만해 하면서도 사실 아직 모르는 구석도 어지간히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우리처럼 변덕이 심하고 내숭에 능한 여자들을 상대로 하는 남자들은 오죽이나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