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9일 목요일. 흐림

 

서울 가기 전에 방마다 꽃꽂이를 해 두었던 들국화들이 어느 병에서는 시들고 어떤 병에서는 아직도 싱싱했다. 눈여겨 보니 도자기나 오지항아리의 꽃이 훨씬 싱싱하고 오래간다. 꽃들을 다듬고 어제 유림 언덕에서 꺾어 온 들국화와 숙부쟁이를 섞어서 다시 꽃병을 만들어 방방에 갖다 놓았다. 서울에서 사온 시클라멘과 국화도 집안에 들여 놓았다. 지금은 겨울 날 꽃들을 손질할 무렵이다.

 

우이성당 마리아 수녀님이 동기 다섯 명과 함께 오늘 오기로 하였는데 마지막에 가서 취소되었다. 그 중 한 분이 아파서 못 오고 모두 그분의 병문안을 떠났다고 통지가 왔다. 나이든 분들은 먼 길을 한번 떠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나 보다. 박글라라 수녀님 일동이 안의를 다녀갔다. 원래 우리도 동행하기로 했는데 마리아 수녀님 일행과 겹쳐서 못 갔다.

 

한 주간 떠나 있어서 텃밭이 너무도 궁금했는데 내려가 보니 쪽파 밭에는 풀이 많이 자랐고 아욱과 근대는 건강하다. 파밭에 풀을 매주고 북을 돋고 쌈먹는 꽃양배추도 북을 돋아 주고서 물을 주었다. 보스코가 심은 것이다. 그가 심은 부추도 물이 없어 고생하길래 물을 주었다. 뿌리가 실하니 살아날 게다. 고추도 웬 늦농사를 하는지 주렁주렁 새로 열리고 익어가고 한다. 디엠비료를 뿌려줘서일 게다.

 

그런데 배추가 문제였다. 아주 튼실하게 자라고 속도 들기 시작했는데 잎을 헤치고 들여다 보니 그야말로 "배추 종합병원"이었다. 노린재, 검정색 배추벌레, 초록 배추벌레, 진딧물 심지어 여치까지 배추 속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놈은 손으로 잡아주었는데 하다하다 못해 약을 치기로 했다. 함양농업대학에서 배운대로 목초액을 희석시키고 은행 물컹한 겉껍질을 소주에 재워 숙성시킨 액을 섞어서 물에 탔다. 배추 겉에도 뿌리고 배추 속도 벌려서 골고루 뿌려 주었다. 벌레가 많은 것은 두 세번 줘야 할 것 같다.

 

마당의 단추꽃은 이웃집 개가 다녀갔는지, 풀려서 집에 와 있는 풍호가 밀어 쓰려뜨렸는지 모조리 자빠져 있다. 작대를 꽂아서 세우고 금송화도 일으켜 주었다. 올라오는  길가의 이탈리아봉숭화들이 목말라 죽겠다고 늘어져 있어서 저녁 늦게 물을 주었다. 벼타작이 끝난 길은 보스코가 내일 빗자루 질을 해 주기로 하였다.

 

진이네는 어제 청도에서 받아 온 감을 고르고 냉장실에 넣고 감 깍을 장비들을 준비하느라 하루 종일 바쁘다. 감동을 지은 사람들이 똑같이 분주할 게다. 저온창고는 곡성에서 사온 감으로도 이미 가득 차 있다. 진이네 꽂감이 네 동 쯤 될 거라는 내 말에 보스코는 "틀림없이 여섯 동으로 늘어날 게야."라고 장담한다. 하여튼 꽂감은 진이네 가장 큰 가을 농사임에 틀림없다.

 

해가 짧아져서 5시 반에 저녁식사가 끝났는데도 사방이 어둡다. 하루 종일 앉아 있던 보스코와 산책을 나갔다. 벼를 벤 가을 논자락은 언제나 쓸쓸하다. 문상으로 올라가다 보니 태호 할머니는 어두운 밭에 앉아서 콩타작을 하고 있었다. 한해 벼농사는 20킬로 가마니로 170가마니쯤 나온단다. 수매가격으로 친다면 700만원쯤이다.

 

문상에서 한길로 내려오는데 석형씨가 자기집 기초공사를 하다 내려갔고, 체칠리아씨와도 통화를 했다. 오늘 헤드빅 수녀님을 모시고 글라라씨와 함께 진주 병원에 갔는데 아직도 돌아오는 길목이었다. 공소 공동체 전체가 수녀님의 사정을 내 일 같이 염려하고 보살펴 드린다. 아름다운 공동체다. 하늘에는 반달이 우리의 그림자를 옅게 만들어서 끌고 가며 반딧불이는 온데간데 없다. 하늘에 올라 별이 되었나? 풀벌레들이 합창하고 소슬한 바람에 하늘이 흔들리고 별들이 손짓을 하면서 "순란님, 우리 여기 있어요." "하느님, 우리도 여기 있다구요." 라고 속삭이는 몸짓이다. 시원하고 풀잎냄새 그윽한 산길을 달빛 속에 거닐면서 뿌듯한 감사의 정이 절로 우러나는 10월 말의 초저녁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