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1. ㉮ 부처님의 미소와 예수님의 얼굴 (1996. 3. 3.: ㉮해 사순 2)

2. ㉯ 타볼산과 해골산 (1994. 2.27: ㉯해 사순 2)

3. ㉰ 꿈꾸는 사람들 (1989.2.l9: ㉰해 사순 2)

4. ㉯ R.Catalamessa,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2006. ㉯해 사순 2)

 

 

 

1. 부처님의 미소와 예수님의 얼굴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태 17.1~9)

 

몇 해 전 결혼 주례 차 경주 땅을 난생 처음 밟게 된 필자는 토함산 석굴암의 부처님 상을 보러 갔다. 의연한 본존상이 짓는 그윽한 미소에서 필자는 이제껏 세계 어느 곳에서 본 형상보다 위엄 있고 경건한 인간상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인류가 돌에 새긴 가장 위대한 작품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석굴암의 아미타불을 들게 되었다.

 

사람은 볼품이 있어야 한다. “미모는 말없는 추천장”이라는 속담도 있다. 늠름한 풍채에 멋진 외모는 여인의 눈길만 끄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선망도 일으킨다. 아리따운 여인을 바라보는 모든 남성의 눈빛에는 "아, 드디어 나타났구나!"하던 아담의 경탄어린 저 첫마디가 서려 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오늘 복음에 나온 베드로의 아첨은 극히 정상적이다. 그런데… 해마다 사순절이면 필자는 대웅전에 모셔진 본존,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은은한 미소와 성전에 내 걸린 피투성이로 숨진 그리스도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교한다. 두 분의 얼굴 표정은 고통과 악에 맞서는 인류의 두 가지 대응을 보여주는 위대한 표상이다.

 

과연 화상으로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 나병환자의 뭉크러진 손발과 눈자위, 단말마에 허덕이는 간암 환자의 몸매에서 누가 사랑의 매력을 느낄 것인가? 그런데 비닐과 넝마로 초막을 지어 놓고 행려병자를 데려다 임종을 지켜 주는 수녀가 있고, 부모가 내다버린 정신박약아를 위해 젊음을 바치는 젊은이가 있고, 소록도와 음성 나환자촌에서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이가 있다. 그들은 타볼산에서 잠들었다 도대체 어떤 허깨비를 보았기에, 감겨진 임종자의 눈에서 부활의 불꽃을 본다고 하며 가련한 비렁뱅이의 얼굴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했노라 말하는 것일까? (샤를 델레 [김정옥 역], <소용없는 하느님>, 가톨릭 출판사, 1995 참조).

 

주춤주춤 골고타까지 뒤따라 간 베드로, 그는 십자가 위에 피투성이로 숨진 죄인의 얼굴을 보며 타볼산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기억했을까? "그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그 옷은 빛처럼 하얗던" 그 광경을?

빨갱이라면 온 가족을 처형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온 저 동포를 보며, 전라도 사람이라면 학살해도 괜찮다고 경멸해 온 저 겨레를 보면서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하는 눈이 우리에게 있을까? "에이, 신앙인들이 차마 그러겠어요?"라며 의아해 하는 분들에게 몇 가지 사실만은 꼭 상기시키고 싶다.

 

광주학살이 한창이던 그 주간, 어느 교구를 다녀온 외신 기자가 그곳 고위 성직자에게 들었다며 필자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전라도는 본래 좌익이 많았어요. 이번 사태도 그자들이 일으킨 거에요!" 학살이 끝난 직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상임위를 통해 "군부와 광주시민은 서로 화해하시오!"라는 이상한 성명을 발표하고는 지금까지 15년 간 침묵이다!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광주 사태"의 진상규명은 역사에 맡기자고 주창하자(93.5.13), 김수환 추기경도 "광주의거 진상규명 역사에 맡기자!"(93.5.23 평화신문)고 신앙인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다 이태 후 김영삼 대통령이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자(95.11.17) 김수환 추기경도 관훈 클럽 강연에서 (95.12.20)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잘못된 과거를 단죄하고 권력과 금력에 의한 부정부패를 척결하자!"고 호응하였다.

 

그러자 지난 2월호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김남수 주교는 "광주 사태"를 '민란'이라고 부르면서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전두환 씨와 노태우 씨는 우리를 5∼6년 동안 지배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호소하였다. 그 이유는 "남북 대치 상황에서 우리끼리 이렇게 싸워야겠는가?"였고, 수천 억 부정 축재나 5·18의 조사가 "국민 화합의 저해 요소로 작용할까 그게 걱정"이었다. 그리하여 김주교는 월간조선 기자에게서 빅토리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신부님'으로 칭송받았다.

(1996. 3. 3.: ㉮ 사순 2)

 

 

2. 타볼산과 해골산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마르 9.1-9)

 

아브라함의 위대한 순종, 이유도 설명도 여유도 없이 내려진 하느님 명령에 입씨름도 불만도 없이 아들을 데리고 떠나는 노인의 모습을 보라! 오늘 들린 첫 독서는 이렇게 우리를 뭉클하게 한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사이, 평소에 걸치고 다니시던 칙칙한 삼베옷은 “이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같은 얘기가 루카한테 가면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로 바뀌고, 마태오에게는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고 또 다시 변한다. 베드로는 그토록 감격스러운 장면이 행여 끝날까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고 한 마디 한다.

 

그때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나누던 것은 무슨 얘기였을까? 마르코에는 없는 대화 내용이 루카에는 나와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 일찍이 제자들이 보지 못했던 이 신비경에서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과 나누시는 대화 내용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타볼산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골고타의 비참상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오늘 타볼산에서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그분이 며칠 뒤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졌다."(이사 52,14) 빛나던 그분이 애탄의 대상이 되리라고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게다가 그 끔찍한 사형장에서도 "선생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할 미치광이가 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는가?

 

타볼산에서 골고타를 떠올리기 힘든데, 하물며 골고타의 참상에서 타볼산을 회고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더구나 골고타의 주님 얼굴과 닮은꼴의 사람에게서 타볼의 영광을, 하느님의 모상을 연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결국 우리는 다시 마태 25장의 비유,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과 "사람의 아들"이 동일하다는 신비에 직면한다.

 

사순절 십자가의 길을 돌며 "그 외아들 죽으실 때..." 노래를 부르는 우리의 콧등은 쉽게 시큰해진다. 하지만 정작 아들딸이 경찰에게 살해당한 엄마, 가족이 군인에게 학살당한 광주 사람, 자식과 남편을 감옥에 넣어 둔 여자를 눈앞에서 마주 대한다면 얼마나 심기가 불편하던가? 성모님의 통고는 그리도 안쓰럽지만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어머니의 서러움과 한에는 무감각하지 않는가?

 

사순절은 우리 생각과 말씨와 행실을 바꾸는 계절이란다. 허나 우리에게 사순절은 텔레비전의 연속극 보며 콧등이 찡해지는 그런 감상과 다르지 않다.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얻은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하느님께 바치는 모습에는 깊이 경탄하면서도, 내 손아귀에 있는 것 좀 나누어 먹으라는 말이 나오면 눈을 부라리는 우리다. 노조, 운동권, 좌익, 전교조 이런 단어만 들어도 울컥 화가 치민다면, 소말리아의 참상을 뉴스에 보고 접하면서 사순절 단식과 금욕을 다이어트로 생각한다면, 북한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봉쇄와 경제 제재가 고소하다면, 우리는 분명히 '사고방식에 있어서 회개할' 처지이다.

 

여하튼 우리는 골고타에서 피투성이 얼굴을 하고 죽을 분이, 어째서 타볼산에 올라가 해처럼 빛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셨는지 알아듣기 몹시 힘들다. 타볼이 곧 골고타임을, 아니 해골산이 곧 타볼산임을 깨닫기란 우리에겐 거의 불가능하기만 하다.

(1994. 2.27: ㉯ 사순 2)

 

 

3. 꿈꾸는 사람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루카 9,28-36)

 

선생님이 산에 올라가실 때마다 으레 밤을 새워 기도를 하시니, 수행원은 할 일 없이 기다리다 지쳐 잠들기가 예사였다. 타볼산에서도 제자들은 '잠에 빠져' 있었다. 겟세마니에서는 선생님이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3년의 세월이 짧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평생을 걸고 나선 우리에게 그 3년은 무던히 긴 세월이었지. 선생님 말씀을 듣겠다고 가파르나움의 그 많은 군중이 거리를 가득가득 메우곤 했었지. 선생님만 모시고 나타나면 마을마다 장바닥이었고 천하의 환자나 병신들은 다 모여들었지. 옷단만 만져도 거뜬히 나았으니까. 나임에서는 홀어미의 외아들이 부활했잖아? 호숫가 언덕은 인산인해였어. 빵의 기적! 그야말로 인기의 절정이었고 주님을 옹립할 절호의 기회였지. 백성이 움직였으니까. 얼마나 고대했던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던가! 그런데 그 귀한 천우신조의 기회를 선생님은 놓치고 마셨어. 아니, 당신이 마다하셨단 말씀이야."

 

타볼산 봉우리에서 선생님이 밤을 새우시는 동안, 베드로와 동료들은 방해가 안 될 만큼 멀리 떨어져서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날부터 대세는 기울기 시작했어. 대대적인 군중집회는 더 이상 열리지 못했지. 예루살렘의 높은 양반들은 여론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당장 눈치 챘을 거야. 선생님은 갈릴래아마저 등지고 변두리 땅으로 돌고 계시지 않아?" "허나 솔직히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라구. 당신이 많은 고난을 겪고 당국자들 손에 죽는다니 말씀이나 될 법해? 그럼 우린 뭐가 되는 거야?"

 

병자와 불구자는 아직도 지천으로 널려 있고 가난한 천덕꾸러기는 여전히 그 신세 그대로였다. 허나 군대를 풀어 무죄한 겨레의 피를 흘린 자들, 성전의 위선자들, 빈민들을 수탈한 부호들은 여전히 태평을 누리고 있었다.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기미가 안 보였다. 꿈이 깨진 것이다.

 

답답한 생각에 번민하다 제자들은 새벽잠이 들었고 모세와 엘리야를 꿈에서 본다. 선생님의 모습이 변하고 옷은 눈부시게 빛났다. 얼마 갈지는 모르나 당분간 그들을 지탱해 줄 또 하나의 꿈이었다. (1989.2.l9: ㉰ 사순 2)

 

 

4. Raniero Cantalamessa,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2006. B. II Domenica di Quaresima)

     Ascoltatelo!      Marco 9, 2-10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에게 유일한 스승으로, 율법과 예언자들을 초월하는 결정적인 스승으로 건네주신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곳은 어디인가? 무엇보다도 우리 양심을 통해서 말씀을 건네신다. 양심은 하느님이 우리 마음속에 설정하고 파견하신 리포터요 특파원이다.

 

하지만 그것 하나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걸핏하면 양심이 우리가 듣기 좋아하는 소리만 내게 만들기 십상이다. 복음으로, 교회의 가르침으로 양심의 소리를 비추고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특별한 공간은 복음서다. 하지만 알다시피 복음의 말씀도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해석이 제대로 된 해석인지 확인해 주는 것이 바로 그런 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알아낼 필요가 있다. 매스컴이 멋대로 외곡하고 조작한 가르침 말고 교회가 가르친 그대로 알아두어야 한다.

오늘날 예수님이 어디서 말씀하시는지 알려면 어디서는 그분이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가도 알아야 한다. 그분은 점쟁이나 강신술사(降神術士)나 복화술사(複話術士)나 사주와 신수를 보는 사람들을 시켜서 말씀하시는 일이 없다. 성경에는 이런 경고 말씀이 나온다. “너희에게는 점쟁이나 복술가와 요술사와 주술사, 그리고 주문을 외우는 자와 혼령이나 혼백을 불러 물어보는 자와 죽은 자들에게 문의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짓을 하는 자는 누구나 주님께서 역겨워하신다.”(신명 18,10-12)

 

이런 따위는 이교 세계에서 신성과 통하는 대표적인 방식들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별의 운행과 동물의 내장과 심지어 새들이 날아다니는 포물선을 보고 점을 치기까지 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른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는 한 분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 뜻을 찾는다면서 이런 점쟁이 저런 술사들을 찾아다닌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모든 답변이 다 나와 있다.

 

그런데 현대에도 저런 주술들이 유행을 타고 다시 돌아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참 신앙이 줄어들면 미신이 늘어나는 법이다. 아무 해가 없다면서 태어난 별자리 운세나 12지간 운세를 보는 짓이 유행한다. 날마다 시청자나 독자들에게 별자리나 12지간을 갖고서 그날의 운세를 짚어 주지 않는 잡지나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없을 정도다. 조금만 상식과 유머 감각이 있어도 이 모든 짓거리가 장난이요 심심풀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길게 보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나온다. 어린애들과 젊은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것과 접하다 보면 인생의 성공이 공부나 일, 자기의 노력과 인간관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운명적이고 외적인 무엇에 달렸다는 사고방식이 스며든다. 이러저러한 세력을 힘입어 문제를 풀려는 태도도 나온다. 더구나 선악의 문제에 가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나의 선행과 악행을 우리 책임과 의지에 돌리지 않고 별자리와 운수에 돌리면서 손을 털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을 안 하시는데 늘 예수님을 내세워 떠드는 분야가 또 있다. 사적 계시, 천상 메시지, 각종 발현과 음성이 그것이다. 그리스도나 성모님이 그런 방도를 쓰지 못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과거에도 종종 그렇게 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그런 소문을 들을 적에는 혹자의 병든 상상력에서 온 것이 아닌지, 사람들의 선의를 속여서 뭔가 챙기는 자들의 소행이 아닌지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이나 소문에 접하면, 교회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교회의 판단을 앞질러 가서는 안 된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경고는 지금도 통한다. “너희 크리스천들이여, 좀 진중하게 움직이라. 깃털마냥 (갈대 마냥) 바람 부는 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신곡, 천국 5.73)

 

십자가의 성 요한이 한 말이 있다. 하느님이 타볼산에서 예수님을 두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신 다음부터 하느님은 벙어리가 되셨다. 당신이 하실 말씀을 다 하셨고 새로 계시하실 것이 없어졌다. 그분에게 아직도 새로운 계시나 새로운 답변을 요구하는 자는 하느님께 욕을 드린다. 마치 그분이 할 말씀을 제대로 확실하게 하지 않으셨다고 따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모두에게 지금도 그 말씀만 하신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복음서를 읽어라! 너희가 찾는 것보다 훨씬 많은 대답을 얻어내지 덜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