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일

 

1. ㉮ 엠마오 삼십리 길 (1993. 4.26: ㉮해 부활 3)

2. ㉮ 희망을 걸고 있었다 (l987.5.3: ㉮해 부활 3)

3. ㉰ 티베리아 호숫가의 숯불구이 조반 (l980.4.20: ㉰해 부활 3)

4. ㉯ R.Cantalamessa, "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 (2006. ㉯해 부활 3)

 

 

 

1. 엠마오 삼십리 길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루카 24,13-35)

 

서럽디 서러운 길, 한 사람의 꿈과 행복이 일시에 무너진 뒤 비척이며 걸어가는 삼십 리 길, 그것은 우리 누구나 걸어 본 길, 이 겨레가 너무나 오래 걸어온 길이기도 하다.

 

지난 연말 대통령 선거가 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허로운 심정으로 이 길을 걸었던가? 죽기 전에 이 나라에 힘없고 돈 없는 사람도 잘살 수 있는 세상 딱 한번이라도 보았으면 꿈꾸었던 사람들, 30년 평생 민주화에 온 힘을 쏟았던 사람들, 전교조 선생님들, 철장 안의 양심수들...

 

전기, 후기, 전문대 입시결과가 발표되면서 얼마나 숱한 젊은 혼들이 허공에 뜬 발길로 거리를 헤매고 어버이는 저리게 에어오는 가슴을 안고 뜬 눈으로 밤을 샜던가? 갑작스런 해고통지에 샛노랗게 질린 채 떠나온 직장, 엉겁결에 이혼 당하고 자식 빼앗기고 위자료 한 푼 없이 내팽개쳐진 여인이 걷는 길, 암 진단을 받고서 병원을 나오던 발길, 사랑하는 사람을 무덤에 묻고 돌아오던 길, 바로 그 길...

 

그 길에 나그네 하나 우리 곁으로 다가선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어차피 신앙인은 십자가를 져야만 천국의 영광에 이른다고 설법을 하는데 우리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서산에 노을은 곱지만 누리는 어둠에 잠겼고" 어쨌든 산사람은 먹어야 한다. 나그네는 식탁에 앉자 빵을 들고 찬양한 다음 그 빵을 나눈다. 그제야 우리는 알아보았다! 그가 누구인지!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땅과 돈을 많아 가진 자가 부끄러운 세상이 왔다. 괴로운 교형 자매는 자기 빵을 나누어 보시라! 의심은 사라지고 가난한 이는 당신들에게서 주님을 알아 볼 것이다. 새 정부에 봉사하는 신앙인에게 호소하고 싶다. 사면에 사면을 거듭하여 무죄한 이들을 감옥에서 풀어 놓으라! 네 해를 실업자로 죄인으로 떠돌아다닌 선생님들을 하루빨리 교단으로 돌려보내라! 지난 30년간 "고통을 전담해 온" 이에게 분담을 요구 말고,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법을 속히 도입하라! 행정과 재판, 경제와 인사에 정의를 구현하라! 이 겨레는 너무 오랫동안 골고타와 엠마오의 길을 걸어왔다!

(1993. 4.26: ㉮ 부활 3)

 

 

2.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l3-35)

 

부활절을 맞았지만, 요즈음 '희망'처럼 입 밖에 내기 힘든 말마디가 또 있을까? 고문, 살해, 복지원 살해, 야당 박해, 전국을 누비면서도 치외법권을 누리는 각목의 백골부대, 수도를 가득 메워 국민을 협박하는 경찰력 시위…. 추기경께서는 이런 정국을 한마디로 '전제정치'라 하셨지만, 이 나라 헌법이야 이미 처형을 당하였고 그 일이 있은 지도 30년이나 지났다. 국민을 상대로 한 '추악한 전쟁'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국토와 겨레를 두 조각 낸 대국인들은 "광주 사태" 때 결정한 7×3=21년의 정책을 꾸준히 시행하는 중이다. 국민에게는 '공적(公敵)'이지만 그들에게는 '획기적 민주를 이루는' 충복들이어서 전보다 더 폭넓은 작전권을 부여했다나.

 

월남을 지켜본 사람에게는 절망이 더 크다. 세계 최강의 군대가 제2차 세계대전을 능가하는 화력을 쓰고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국민의 마음이 떠나 버리면, '야훼의 영광(‘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이 도성을 떠나 버리면' 무엇이 역사의 대세를 꺾을 것인가? 우리는 눈이 가려져 이런 파국이 안 보이는 것일까? 우리가 감옥에 처넣고 도회지에서 철거시키고 신음소리도 못 내게 겁주고 짓밟아 놓은 저 쓰레기 인생들의 악 받친 저주나 거짓 예언자들의 흰소릴까?

 

'큰 능력을 보이는 예언자'에게 희망을 걸었다면 절망은 당연하다. 한 번의 친위 쿠데타, 한 건의 '국가전복음모' 재판, 긴급조치 하나면 그런 예언자는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다. 우리가 희망을 걸어야 할 분은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 있는 의인이다. 죽어서도 살아서 그 제자들을 똑같은 길로 끌어들이는 그 마력이다. 죽여도 죽여도 맨손을 합장하고 줄지어 오는 십자가 뒤의 행렬이다. 악에게 덤비는 무저항의 인해전술이다. 지난 30년만 해도 산더미처럼 시체가 쌓인 희생자들…. 바로 그들이 이 나라의 실낱같은 희망이다. 예레미야처럼 주님이 꾀시는 말씀에 어수룩하게 '우리가 뜨거운 감동을 느낀다면' 제아무리 공포가 심하고 살 길이 막막하더라도 눈을 딱 감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한 알의 밀알로 죽어 썩는 것이 내가 살고 내 피붙이가 살고 이 겨레가 살아남는 길이기 때문이다.

(l987.5.3: ㉮ 부활 3)

 

 

3. 티베리아 호숫가의 숯불구이 조반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갈 것이다." (요한 21,1-19)

 

“최후만찬”은 르네상스 이래로 서양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소재였다. 그 그림들을 보면 유독 불편하게 시선을 끄는 인물이 있다. 가리옷 사람 유다! 열 한 제자들은 경외심과 놀람으로 주님을 우러르고 있는데 유다만은 돈주머니를 쥐고 얼굴을 딴 데로 돌리고 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주님이 일곱 제자와 생선 숯불구이와 빵으로 오붓한 조반을 드시는 장면을 화폭에 담는다면 여기에도 불편한 관계의 인물이 하나 나온다. 주님께 되도록 멀리 떨어져 앉아 그 큰 몸집을 다른 제자 등 뒤로 감추느라 애쓴다. 고개를 수그린 채 부지런히 생선뼈만 발라내고 있다. 시선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몹시 조심하지만 귀만은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다 듣고 있다. 그는 시몬이다.

 

불안한 조반이 끝났다. "시몬!" 무심결인 듯 잔잔한 스승의 음성이셨지만 시몬은 화닥닥 놀란다. "예!"라는 대답이 너무 컸다.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사제가 봉독하는 줄거리 그대로다.

 

필립보의 카이사리아에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떠나오면서는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타볼산에서는 선생 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족례 때에는 "그러면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곧잘 하던 시몬! 다락방에서는 장담을 하고 동산에서는 무작정 칼을 휘두르던 시몬! 가야파의 저택에서 스승의 눈총을 뒤통수에 받으며 뛰쳐나가 슬피 울던 시몬! 스승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숨이 턱에 차서 골고타로 달려오던 시몬! 방금도 예모를 차린답시고 겉옷을 두르며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시몬! 비록 천방지축이기는 하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제자! 저처럼 우직하게 사랑을 표하는 제자를 어느 스승이 미워하겠는가?(“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정말 사랑하느냐?" 죄 주시거나 꾸짖거나 비아냥거리는 말씀이 아니었다. 온 인류의 죄악을 용서받아 내신 이 마당에 누구의 잘잘못을 시비하시겠는가!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는 당부를 하시자는 실마리였다. 이 말씀이 "너를 교황으로 세우노라."는 뜻보다는 "내 양들이니 부디 잘 돌보아 달라."는 청탁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섬기러 오셔서 벗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신 분의 마지막 말씀이 긴 여운을 남긴다. "나를 따르라." (l980.4.20: ㉰ 부활 3)

 

 

 

4. Raniero Cantalamessa, "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

     (2006. B. III Domenica di Pasqua)

     È risorto in verità      Luca 24,35-48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분의 여러 발현 가운데 하나를 곁에서 지켜보게 해 준다. 엠마오 가던 제자들이 방금 예루살렘에 달려와서 자기들이 길에서 당한 사건을 허겁지겁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나 놀라고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 다음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였다.”

 

그들이 보인 불신은 아주 독특한 것이었다. 이미 믿고 있던 사람의 태도였다(그렇지 않다면 기쁨이 나올 리가 없다). 그렇지만 주체를 못하는 믿음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믿기지가 않아요!” 하는 태도다. “믿기지 않는 믿음”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이 어떨까?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예수님은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신다.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마음이 통하게 만드는 데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좋은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일화는 부활에 관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전해 준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입증하는 위대한 기적이나 논증이나 논리가 아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이며 놀람과 기쁨을 안고서 믿음으로 들어가는 새 세상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창조다. 예수님이 되살아나셨다고 믿는 문제가 아니고 “그분 부활의 힘”(필립 3,10)을 인식하고 체험하는 일이다.

 

파스카의 이 심원한 차원을 동방교회 신자들이 각별하게 체험한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전부다. 부활절에 누구를 만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상대방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대꾸한다. 이 관습이 민중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볼셰비키 혁명 초기에 이런 일화가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공청회 내지 공개토론이 있었다. 먼저 무신론자가 발언하여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신자들의 믿음을 단번에 영구히 무너뜨리겠다는 식으로 연설을 하였다. 그 사람이 강단에서 내려오자 정교회 사제가 올라가서 변론을 펴기로 하였다. 그 소박한 성직자는 연단에서 청중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한 마디 하였고 모든 청중이 이구동성으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대꾸하였다. 그러고 나서 성직자는 말없이 강단에서 내려왔다.

 

동방교회 성화에는 부활 장면이 전혀 다르게 그려진다. 탁 트인 하늘이 배경이 아니라 지하세계가 배경이 된다. 부활하시면서 예수님이 올라오시는 것이 아니고 내려가신다. 죽은 이들의 세계에서 그분을 기다리던 아담과 하와를 놀라운 힘으로 끌어내시어 생명과 부활로 데려가신다. 두 원조 뒤에는 무수한 인간 군상이 따라나선다. 구속(救贖) 사업을 기다리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방금 당신이 문설주를 빼내어 때려 부순 지옥문을 밟고 지나가신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눈에 보이는 원수들 못지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들에게도 미친다. 죽음, 어둠, 불안, 악령에게 미치는 승리다.

 

우리는 이러한 표상에 이미 말려들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이기도 하다. 저 장면을 바라보는 모든 남자는 아담과 자기를 동일하게 보라는 초대를 받고 모든 여자는 하와와 자기를 동일시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무덤 밖으로 이끌려나갈 수 있게 팔을 뻗쳐 그리스도의 손을 잡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파스카의 새 탈출이다. 하느님이 “굳센 팔과 힘 있는 손”을 갖고 오셨고 당신 백성을 해방하신다. 이집트의 노예 살이보다 훨씬 무섭고 보편적인 노예 살이에서 해방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