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일

 

1. ㉯ 멋쟁이 목자 (1994. 4.24: ㉯해 부활 4)

2. ㉯ R.Cantalamessa, “나는 착한 목자다” (2006 ㉯해 부활 4)

 

 

 

1. 멋쟁이 목자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요한 10,11-18)

 

이백 주년 성서는 오늘의 복음을 전보다 훨씬 멋있게 번역하였다. "나는 어진 목자(ho poimen ho kalos)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좋다'는 말을 그 한 마디로 부족한지 반드시 ‘아름답고 선한’(kalos k'agathos)이라는 두 마디로 표현했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목자는 웬일인지 '선한'(agathos) 목자가 아니라 '아름다운'(kalos) 목자이다. 쉽게 말해서 '멋진' 목자다.

 

사람은 양을 잡아 고기는 먹고 가죽은 통째로 뒤집어 무스탕을 만들고 털로 옷을 짜 입는다. 삯꾼이라면 당연히 기왕이면 토실토실 살찐 양이나 포동포동 맵시 나는 암양에게 관심이 간다. 그러나 멋쟁이 목자는 여위고 비루먹어 물통 앞에서도 제 차례를 얻지 못하는 양과 새끼 양에게 각별한 보살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양들은 삯꾼과 멋쟁이 목자를 잘도 구분해 낸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지만 실제로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사람을 목장 주인은 어떻게 취급할까? 목숨을 버리는 일은 차치하더라도, 지금처럼 경영 합리화의 시대에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다고 자리를 비웠다가는 목장 주인한테 당장 해고통지를 받는다. 그래도 멋쟁이 목자는 잃은 양 한 마리, 사회와 교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에게 자꾸 마음을 쓴다.

 

그러나 멋쟁이 목자라면 동료 성직자나 장상에게 어지간히 구박을 받더라도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going my way).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루카 22,22)이라며 벽지로, 감옥으로 떠난다. 동료 사제 중 누가 떠났다고 해서 베드로처럼 "유다는 사도직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going his own way)"(사도 1,25)라고 비아냥거리지도 않는다.

 

멋쟁이 목자는 수천 명이 넘는 본당 신도에게 말씀을 펴고 성사를 베푸는데 여념이 없다. 본당에서 사제 권위가 돈주머니에 있다고, 결재하는 도장에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는 목자이지 경리사원이 아니다. 또 멋진 목자는 사람을 치는 목자이지 건물을 부수고 짓는 집장사가 아니다.

 

멋쟁이 목자는 목자의 직분에 약간의 영웅심이 필요함을 안다. 늑대가 올 때 도망갈 사람이 아니라는 보증을 세운다. 그래서 자신을 비우고, 인생의 가장 고귀한 사랑과 행복을 포기한다. 사내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섹스가 상품으로 깔려 있고 모든 것이 섹스로 영상화되는 세계에서 그는 고독하게 독신으로 살며 하늘을 가리켜 보인다. 비록 그 영웅성 때문이라도 독신은 교회법의 제도로 강요하기보다는 자유로이 선택하고 결단하는 일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부제서품의 서약에 충실하다.

 

그래 우리 주님은 정말 멋있는 분이셨다. "어진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 그분은 당신 목숨을 내놓고서는 어떤 인연으로든 당신한테 가까이 오는 사람에게 마술을 씌우신다. 그 사람도 당신처럼 목자로 나서게 충동하시고, 기왕이면 당신처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게 꾀시고, 기어이 이리떼 습격에 말려들게 만드시고, 목숨을 내놓을 용기를 주신다. 그래서 온 세계 언덕마다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고, 도살장에서처럼 이 목자에게 삶과 죽음의 영감을 받은 자들이 쇠갈쿠리에 줄줄이 매달려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요한 10,18).

 (1994. 4.24: ㉯ 부활 4)

 

 

 

2. Raniero Cantalamessa, "나는 착한 목자다.”

    (2006. B. IV Domenica di Pasqua)

    Io sono il Buon Pastore      Giovanni 10,11-18

 

 

부활 후 제4주일은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 불린다. 성서에서 목자가 갖는 비중을 알아들으려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지금도 그 지역에서 사는 베드윈족은 당대에 이스라엘 부족사회에서 어떤 생각이 통했는지 상당히 중요한 정보를 준다. 그 사회에서 목자와 양떼는 단지 경제적 가치에 기반하는 관계가 아니다. 목자와 양떼 사이에는 거의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된다. 주변에 아무런 생물이 없는 외딴 곳에서 여러 날을 함께 보내는 사이다.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대해서 다 아는 처지가 되고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잘도 구분한다. 목자는 줄곧 양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인류에 대한 당신의 관계를 표현하시려고 이 상징을 이용하신 이유를 알 만하다. 시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시편 하나가 믿는 이가 하느님께 드리는 안도감을 목자에 대한 신뢰로 나타내고 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그 결과 지상에서 하느님 대신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목자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임금이나 제관이나 지도자 모두에게 주어진 칭호가 되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상징성이 갈라진다. 더 이상 보호와 안전만 가리키지 않고 수탈과 압제도 상징하게 된다. 착한 목자의 이미지와 더불어 악한 목자, 삯꾼의 이미지도 등장한다. 에제키엘서를 보면 자기 자신만 돌보는 악한 목자들을 성토하는 무시무시한 글이 나온다. 그래서 하느님 친히 당신 양떼를 돌보시겠다는 언약이 뒤따른다.(에제 34,1 이하)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착한 목자와 악한 목자의 도식을 다시 채택하시는데 거기에는 새로운 면이 있다. “나는 착한 목자다.”라고 선언하신다. 하느님의 언약이 실현된 것이다. 온갖 기대를 뛰어넘는 실현이었다. 비록 착한 목자이지만 어느 목자도 감히 못하는 것을 그분은 감행하신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현대인은 양 노릇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양떼라는 이미지를 아주 싫어한다. 이 표상에 숨은 깊은 뜻을 감지하지 못한 까닭이다. 실상 우리 사회의 가장 뚜렷한 현상 하나가 대중화다. 우리는 눈에 띠지 않는 갖가지 조작과 충동에 그냥 몸을 맡기는 경향이 있다. 웰빙의 모델, 행동 모델, 진보와 발전의 이념과 목표 등을 남들이 고안해 내고 우리는 순순히 따라간다. 혹시나 몇 발자국 뒤떨어지지나 않을까 겁을 먹은 채로 무조건 따라간다. 여론이 조종하고 조작한 통로를 따라간다. 남들이 먹으라는 것을 먹는다. 남들이 가르치는 대로 옷을 입는다. 남들이 슬로건을 걸고 외치면 우리도 거기에 따라서 말을 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나오는 구절대로 “다들 그렇게 하니까”(cosi' fan tutti) 대다수가 자기가 내릴 선택을 남이 내려주도록 맡긴다.

 

현대의 대도시에서 군중의 삶이 어떻게 영위되는지 눈여겨보시라! 아침이면 한데 몰려 나가고 한꺼번에 소란을 피우고 정해진 시간에 버스와 지하철에 올라타고 저녁에 일정한 시간에 나와서 일제히 양우리로 몰려간다. 자기라는 것도 없고 자유라는 것도 없다. 필름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웃어댄다. 인형극의 곡두각시처럼 깝죽거리며 걷는 쇼를 보면서 즐거워한다. 조금만 정신 차려 바라보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데 말이다.

 

착한 목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른 체험을 해 보자고, 해방의 체험을 해 보자고 제안하신다. 그분의 양떼에 속한다는 것은 대중 속에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지켜진다는 뜻이다. 성 바오로가 하는 말이 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 3,17) 그곳이야말로 인간 개개인에게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자산이 있고 자기의 운명이 있다. 거기서 하느님의 자녀가 모습을 드러난다. 물론 오늘 둘째 독서에서 말한 대로 아직은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