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승천 대축일

 

1. ㉯ 기쁘지 않은 축일 (1979.5.27: ㉯해 예수승천)

2. ㉯ R.Cantalamessa, 주님의 승천 (2006 ㉯해 예수승천)

 

 

1. 기쁘지 않은 축일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마르 16,15-20)

 

"알렐루야, 알렐루야! 살아나신 주님께서 환호 소리 높은 가운데 아버지의 오른편 자리로 승천하셨습니다." 미사 해설자는 감격스러운 음조로 입당해설을 한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l6, I6-22) 예수님의 고별사에도 감격의 빛이 역력하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축하하고자 하느님의 집에 모였습니다. 이 기쁜 날에..." 사제의 설교에도 대축일의 정열이 서려 있다.

 

그러나 막상 성당에 앉아 있는 우리 누구의 얼굴도 예수님의 승천을 "울며 슬퍼하거나" 주님이 출세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올라가신다고 "기뻐하거나" 가슴 밑바닥에다 "알렐루야, 알렐루야!"라고 외치는 것 같지 않다. 지금 성당 안에는 하느님의 집에 모인 기쁨도, 승천의 환호 소리도,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오늘이 주일이기 때문에 그저 의무감에서 "판공을 지내러" 성당에 온 신자들에 불과하다(앙리 누엔).

 

"연중 축일이면 어떻고 승천 축일이면 대순가? 명절이니 축일이니 다 어린애들 이야기지...". 세파에 시달린 우리 귀에는, 오늘로 하느님의 나라가 건국되었다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즉위하셨다는 말씀도, 내 인생의 삶과 죽음이 주 예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도 별반 흥미가 없다. 예수 승천이라면 주일 학교 시절부터 듣고 들어서 환히 외고 있다. 바울로의 설교대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덕분에 우리가 물려받은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지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소치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신 활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기쁨도 감탄도 신비감도 말라 버렸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요한 l6,7)고 하셨다. 성령께서 오셔야만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메마른 심정을 녹이실 것이고, 그래야만 우리의 삶이 은혜로워 보이고 축일이 경사스럽고, 모든 사건과 성당의 장식과 전례가 생동하고 기쁘고 밝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첫째 표적은 '기쁨'이라고 한다. 영원한 생명은 보장되었기에, 주님이 세상 끝까지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에, 세계를 인간답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드는 것이 하늘로부터 받은 사명이기에 우리 마음에, 얼굴에, 말씨에, 살아가는 태도에 기쁨이 넘쳐흘러야 한다. 넘쳐흘러서 이웃에게, 직장에, 사회에 번져가야 한다,

(1979.5.27: ㉯ 주의 승천)

 

 

 

2. Raniero Cantalamessa, 주님의 승천

    (2006. B. Ascensione del Signore)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축일을 맞아 ‘하늘’이라는 말로 우리가 무엇을 가리키려 하는지 살펴볼 만하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민족들이 하늘은 신성(神聖)이 거처하는 자리라고 생각해 왔다. 성서도 공간적 개념을 써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표현을 썼다. 과학 시대가 오고 나서 ‘하늘’이 갖는 종교적 의미가 위기를 겪는다. 현대인에게 하늘이란 우리 행성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계가 움직이는 공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소련 우주인이 우주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내가 대기 속을 멀리 돌아보았지만 하느님은 어디서도 만나지 못했다.”고 하던 발언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할 적에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하는지 밝힐 필요가 절실하다. 어떤 사람을 두고 “하늘나라로 갔다.”라고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성서는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관습을 따른다. 하지만 성서는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고 땅에서도 곳곳에 계신다.”라는 말도 하고 하늘을 만드신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하며, 하느님이 하늘을 만드셨으므로 하느님이 하늘에 갇혀 계시는 분은 아니라는 가르침도 내린다.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그분이 가까이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다는 뜻이고, 하늘이 땅에서 까마득하게 멀 듯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먼 거리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와는 무한히 차이나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종교적 의미에서 하늘은 장소라기보다는 상태를 가리킨다. 하느님은 시간과 공간 밖에 계신다.

 

지금 말한 내용을 전제할 때에,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답은 사도신경에 나와 있다. “하늘에 오르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는 말은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뜻이다. 인간으로서도 그분이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가셨다는 말이다. 오늘 둘째 독서에 나오듯이 그분이 만물의 주님이요 머리가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셨으나 땅을 남겨두고 가신 것이 아니다. 우리 시각의 영역에서 나가셨을 뿐이다. 복음서에도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이 나와 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라는 천사의 말은 은근히 꾸짖는 말이 아니라면 일종의 충고처럼 들린다. 그리스도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알려면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살아가야 하고, 그분의 사명을 계승하여 수행해야 하고, 땅 끝까지 그분의 복음을 전해야 하고, 지상생활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 우리가 하늘나라로 간다거나 낙원으로 간다고 말할 적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러 간다는 뜻이 된다.(필립 1,23)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2-3)는 말씀도 하셨다. 그러니까 하늘은 안식의 처소, 선인들에게 영원한 보상을 가리킨다. 하늘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는 순간에 만들어진 처소요 보상이다. 우리의 진짜 하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도 부활하고 나면 그분과 한 몸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미 있던 하늘, 당신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하늘나라를 마련해 주시려고, 하늘이 되어 주려고 가신 것이다.

 

누가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른다.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모시고 영원토록 도대체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지겹지 않을까? 내가 대답하겠다. “우리가 아주 건강한 몸으로 아주 잘 지내고 있을 적에 지겹던가?” 연애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있는 것이 지겹냐고 물어보라. 우리가 그야말로 행복하고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찬 순간이면 그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원이 생기지 않던가? 여기서는 그런 순간이 항상 지속되지 않는다. 이곳에는 우리를 한없이 채워줄 만한 대상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과는 얘기가 다르다. 우리 지성이 하느님에게서 우리가 아무리 바라보아도 싫증나지 않을 진리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우리가 아무리 즐겨도 지겹지 않을 선을 우리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얻어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