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승천 대축일

 

1. 소도둑 같이 생긴 예수님 얼굴 (대구교구주보 "빛" 2001.8)

2. 상지의 좌(집회서 24장) (야곱의 우물 1998.5)

3. ㉯ R.Cantalamessa, "내 영혼이 하느님 안에 기뻐뛰나이다” (2006. ㉯해 성모승천)

 

 

1. 소도둑 같이 생긴 예수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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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의 예수님 얼굴과 “마돈나 네라”


지난 4월 부활절에 즈음해서 전 세계 모든 신문과 우리나라 모든 일간지에는 그리스도신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진 한 장이 실렸다. 영국 맨체스터대학 연구팀이 첨단 법의학과 컴퓨터 기술을 동원해 그려냈다는 “예수의 얼굴”이었는데, 우리가 보아온대로 백인에다 갸름하고 긴 머리카락에 콧수염과 턱수염이 가지런한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누구 말대로 꼭 소도둑놈 같았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 있는 거룩한 염포,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라고 전해오는 천에 새겨진 얼굴 모습과도 너무 달랐다. 만약 예수님 진짜 얼굴이 저 사진대로라면 우리 중 상당수는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그만둘지도 모르겠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상을 만드는데 부처님 신체의 특징을 열거하는 48상을 얘기하지만 신약성서에는 예수님의 신체적 특징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기록이 없다. 엠마오 가던 제자들이 3년이나 함께 살았으면서도 길에서 만난 분의 얼굴을 못 알아본 사실로 미루어 그분은 어지간히 특징 없는 얼굴이었나 보다. 그런데도 우리 머릿속에는 나름대로 예수님 모습이 멋있는 도인(道人)으로 아로새겨져 있어서 저런 컴퓨터 그림에 깜짝 놀라는 것이다.


그뿐이랴? 성모님이 까만 얼굴에다 고생고생해서 쭈글쭈글 주름투성이라고 해 보자. 남편 요셉 일찍 여의고 아들 일찍 출가해버려 먹고 사느라 논일밭일로 오리발처럼 거칠어진 두 손에 로사리오를 들고 계시다고 상상해보자. 게다가 “소도둑처럼” 못생긴 얼굴이 진짜 예수님 얼굴이라면, 그래서 어머니도 저런 아들을 낳을 만큼 못난 얼굴이라면 성모님을 쳐다보는 우리 기분은 어떨까? 우리가 믿기로 예수님에게는 인간 아버지가 안 계신다. 요즈음 과학용어로 말하자면 나자렛 처녀의 복제인간(複製人間)이셨던 셈이니까 인성(人性)에 관한 한 용모나 성품이나 마리아를 똑 닮았어야 옳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최초의 성모성화는 물론 멕시코 과달루페의 기적의 성화도 그러려니와, 폴란드에서 숭상 받는 “마돈나 네라”는 말 그대로 “깜둥이 마리아”다. 하지만 한국의 성모를 그려내는 화가들은 한결 같이 미인도(美人圖)를 만들고 있고, 최근 명동에서 열린 어느 동양화가의 성화전시회에 가보니 제일 먼저 팔려서 딱지가 붙은 그림들은 한결같이 “예쁘디예쁜” 성모상들이었다.

 

마리아님더러 기뻐하시라구요?

8월은 가톨릭신자로서나 한반도에 사는 한겨레로서나 마음 설레는 축일이 15일 하루로 모아져 있다. 광복절과 날짜가 같은 성모승천대축일은 마리아께서 한 많은 세상살이에서 해방되어 먼저 가신 아드님의 품으로, 성 요셉의 품으로 가신 날이기도 하다. 원죄없는 잉태, 동정녀요 어머니, 하느님의 모친, 승천, 또 우리가 성모호칭기도에서 드리는 그 많고 많은 존칭으로 보면 성모님처럼 부러운 분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로사리오를 염할 적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하는 첫 구절에서 항상 목이 멘다. 성모님처럼 한 많은 어머니가 없었는데 그분이 언제 기뻐하셨을까? 그분처럼 팔자가 센 분을 두고 “여인 중에 복되시다”는 말은 욕일까 칭송일까? 천사의 전갈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말씀하신 순간부터 마리아의 평생은 보나마나 고생길이었다. 요셉이 거두어주지 않았더라면 요샛말로 “미혼모”에서 그치지는 게 아니라 아예 나자렛 사람들에게 돌 맞아 죽었다. 호적 올리러 베들레헴에 갔다가 타관에서, 그것도 남의 집 외양간에서 해산을 하였다. 밤을 도와 이집트로 도망가는 피난길에는 베들레헴 근방 금동이 은동이들의 난데없는 비명과 어미들의 통곡을 뒤로 남겨야 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한다면서 홀어머니 버리고 떠나고서 뒤에 들려오는 소식은 하나같이 불안하고 불길한 얘기들뿐이었다. “저 사람 목수의 아들 아닌가? 그 어미는 마리아 아닌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온다는 말은 없소!” 출신성분과 출신지가 애당초부터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저 사람은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 ( 그런 욕에 아들은 ”창녀와 세리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줄 알아라.”고 맞받아쳤다나?) ”밥 먹으며 손 씻는 정결 례를 지키지 않는다.“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뱃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 잡는다고 대꾸나 말 것이지. 집에서도 어지간히 안 씻었으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안식일이 사람 쉬라고 있지 사람이 안식일 지키자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말대답은 사형 깜인데....)


그 성스럽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탁자를 뒤엎고 챗죽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렸단다. 그러고서 한다는 말이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 또 웅대하고 화려한 성전을 손가락질하면서 “저 건물에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아 있나 봐라!”고 저주했단다. (베드로 대성당에 순례 간 신자들에게, 명동성당이나 계산동성당에 오는 교우들 앞에서 이런 소리를 질러대는 자가 있다면 우린들 고이 돌려보낼까?) 제관님들과 바리사이 어른들에게 “독사의 무리들아, 위선자들아, 회칠한 무덤들아!”하며 욕설을 퍼부었단다. 어딜 가나 좌충우돌한다는 소문이었다.


더구나 자기가 최후심판을 한다면 배고픈 사람 적선, 병자구완, 옥살이하는 사람 면회와 석방운동을 판결기준으로 삼겠다고 호언하여 선량한 신자들의 속을 다 뒤집어 놓았다고 한다. “그럼 우린 뭐냐? 세례 받고 주일미사 나가고 교무금 내고 판공성사 보는 우리만 병신이냐? 저 따위로 개나 소나 다 천당 가면 난 거기 안 간다.” (필자의 말이 껄끄럽거든 한 구절만 더 읽어 보시라. “그분은 가난구제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갇힌 이들을 풀어주기 위해 감옥을 찾아가신 일도 없습니다. 한 사람의 수인도 석방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바라빠를 석방한 것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비록 거두절미했지만 10여 년 전 우리나라 어느 교구장님이 내리신 부활절사목교서의 한 구절이다!)


예수님의 모든 언행이 당시의 독실한 신앙인들이 품고 있던 메시아 기준에 전혀 안 맞았다.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으로서는 빵점이었다. 저제나 이제나 제각기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은 이러 저려니 하는 생각을 따로 품고 있어서 그 기준에 안 맞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욕하고 배척하고 심지어 때려죽여왔다.


과연 모두 예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리아의 귀로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점지 받았던 자식이 한창 나이에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었다. 머리위에는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출신지가 죄목으로 나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만큼 기막힌 모습이었다.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불효라는데, 억장으로 무너지는 어미 가슴에 아들은 더욱 기막힌 유언을 남기는 것이었다. “부인, 보십시오, 부인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200주년성서번역). 그래서 승천하신 성모님은 천당에서 편히 쉬실만한데 지난 세기만 해도 루르드, 파티마, 라살렛, 메주고리 등 수십 군데에 나타나 눈물바람을 하시면서 인류의 운명을 챙기신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인지 몰라도 성모님은 승천 후에도 편히 쉬시지 못하는 것 같다.

[대구교구 주보 "빛" 원고 2001.8]

 

 

2. 상지의 좌(집회서 24장)

 

어리석은 남자들과 지혜로운 여자

 

얼마 전에 생긴 일이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아홉 자녀를 둔 여자가 있었다. 독실한 유대교 신자인지라 생리가 끝나고서 정결례에 해당하는 "미크베 목욕"을 하러 교외의 브넬 바라크라는 동네로 갔다. 월경으로 부정을 탄 여자는 밤에, 혼자서, 남자들 눈에 띠지 않게 미크베 목욕을 하러 가야 한다는 관습이 지금도 있나보다. 


그런데 어둡고 한적한 밤길에 그 여자는 세 남정에게 끌려가 겁탈을 당하였다. 아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남편에게로 달려오자, 스무 세기 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파괴당할 당시 제관 계급의 후손을 자처하는 코헨파에 속하는 남편은,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에 랍비와 사정을 의논하였다. 랍비는 율법에 따라 다음과 같은 종교적 결정을 내려 지역사회에 공지하였다. 


"그 여자는, 비록 완력으로 당하기는 하였지만 사통을 하였으므로 부정하다. 따라서 코헨은 간음한 여자와 살 수 없고, 자녀들은 부정한 여자를 어머니로 두어서는 안 된다. 그 여자를 반드시 소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처구니없는 교회 결정에 지역 여론이 비등하자, 그곳의 고위 랍비 이스라엘 보쏘는 "율법은 율법이다. 율법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예외는 없다."고 못 박았다고 한다.


20세기가 3년도 남지 않은 현재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모든 여성이 직장에서 쫓겨났고, 거의 모든 아랍국가에서 기혼여성들은 장옷을 걸치며,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여성할례를 강제로 실시하고, 최근의 알제리아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한 마을 412명을 몰살하고 젊은 여자들은 모두 강간하고 나서 죽이면서 그 짓을 "한시적 결혼"이요 성스러운 종교행위라고 일컫더란다.


나자렛 시골처녀 마리아가 지금부터 2천년이나 전에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면서 미혼모가 될지도 모르는 당찬 결심을 한 곳이 이토록이나 어리석은 남자들의 세계, 현대에 와서도 가장 악랄한 남존여비의 셈족 사회였다.


그리고 셈족을 위시해서 남성본위로 사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유교 지도자들의 저 어리석음을 꿰뚫어 보던 이 여인 덕분에 인류는 하느님의 지혜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구세주로 받들게 되었다. 또 성모 호칭기도 속에 지혜가 자리 잡는 왕좌라는 의미로 "상지의 좌"라는 호칭이 들어온 것도 까닭이 없지 않다. 성모공통미사 10에서 집회서 24장을 첫째 독서(1-2. 5-12. 19-22절)로 삼고 우리가 이 장을 골라 명상하는 것도 그러한 명분에서다.


나는 순결한 사랑과 경외심과 지식과 거룩한 희망의 어머니다.

그분이 영원으로부터 정해 주신 자녀들의 어머니다.

나를 원하는 사람들은 나에게로 와서,

나의 열매를 배불리 먹어라.

나의 추억은 꿀보다 달고

나를 소유하는 것은 꿀 송이보다 더 달다.

나를 먹는 사람은 더 먹고 싶어지고

나를 마시는 사람은 더 마시고 싶어진다.

나에게 복종하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게 되고

내 명령대로 일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으리라. (집회 24,18-22)

 

"예수님 엄마"


개신교신자인 조카가 로마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도시들이며 그 화려한 성당들과 화랑들을 모두 구경하고 나서, "이탈리아에 와서 과연 무엇을 보았느냐?"는 물음에 무심코 "어디 가나 예수님과 예수님 엄마를 보았다."고 답변하는 말을 들었다. 르네상스를 전후해서 성모를 그리던 이탈리아 화가들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모습을 화폭에 창작해내면서 초자연적 모성과 자연적 동정성을 한데 조화시키려 무진 애를 썼지만 지혜문학을 명상하는 이들은 성모자상에서 "지혜를 품고 있는 여인"을 발견한다.


과연 신약성서를 펴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계획 앞에서 "현자"로 처신한다. 특히 루가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메시지에 늘 귀 기울이고 고즈넉이 간직하는 여인상으로 그린다.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천사의 엄청난 인사에 처녀는 몹시 당황하면서도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였다"(루가 1,29). 성탄날 밤에 난데없이 찾아온 목자들이 들려준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2,19). 성전에서 잃었다가 다시 아들을 찾은 다음에도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2,51).


자연의 이치나 세상인간사나 하느님의 표징을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오래 간직하는 일이 성서가 말하는 현자의 처신이다. 마리아의 자세는 여성의 수동적 자세를 답습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경륜에 입각해서 자기가 취할 태도와 행동이 무엇인지 알아내려는 데에 있다. "아이를 겉 낳지 속 낳나요?"라는 속담이 있다지만, 마리아의 저러한 자세는 성모와 그 아드님을 혈육으로만 아니라 영으로 이어주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다"(루가 8,21)라는 말씀이 아드님 입에서 나올 정도로 두 분을 같은 얼로 살고 죽게 만들었다. 예수의 삶이 파란만장했던 것도, 아들의 처형장에 버티고 서 있을 정도로 강단 있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성품 탓이었으리라.


그래서인지 9세기부터 성모(공통)미사에 지혜문학서들이 들어온다. 지금도 성모공통미사 9번 독서는 잠언 8장을, 10번 독서는 집회서 24장을 첫째 독서로 간직하고 있다. 지혜를 인격화하고 신격화하는 본문이므로 본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지혜로 표상하는 장절로 해석하면서도 교회는 전례 중에 성모님을 이상의 여인으로, 인간적이고 신적인 지혜를 표상한 여인으로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구약의 현자들이 부단히 추구해온 "지혜"라는 여인이 지금은 로고스의 "처녀 엄마"(동정 성모)로 형용되기에 이르렀다.

 

성모성월에 보는 백악관 "지퍼게이트"


"하느님이 무엇 땜에 세상을 만드셨을까?"라는 물음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이 착하셔서, 하느님이 사랑하셔서 우리가 존재한다."(신국론 1.32.35)라고 답변하였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면 우리가 존재한다. 두 남녀가 사랑하면 (둘이 맺어지지 않았던들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생명들이 자녀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하느님이든 사람이든 사랑을 하면 그의 존재가 커진다(magis esse), 성애(性愛)든 우애든 인인애든...


우리야 IMF 폭풍에 휘말려 미국 백악관의 소위 "지퍼게이트"를 낄낄거리며 감상할 여지가 거의 없지만, 엔간한 사람들까지도 "제니퍼 플라워", "파울라 죤스", "모니카 르윈스키"하는 여자들 이름을 알게 되었다. 성서적 지혜를 갖추어 살려는 사람들에게 미국 매스컴들의 이 포르노 쇼핑은 어떻게 비칠까?


미국 대통령이라는 권좌를 이용한 남자가 자행한, 여성들에 대한 성희롱에 많은 여자들이 분개함은 의당하다. 그런데 미국의 여성학자 수잔 팔루디(Susan Faludi)는 "이 사건은 여성의 권리와 아무 상관없다. 관련된 인물들의 사생활 문제다."라고 단정한다. 여자 나이 만18세면 어엿한 성인인데 어째서 섹스게이트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남자의 성노리개요 희생자로 자처하느냐는 반문이다. 


순수한 애정에서든 불륜으로든 금전거래로든 성인 남녀들이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고서는 막상 극우정치가들이나 언론들의 추썩임만 받으면 당장 피해자로 변신하여 인간학적으로 늘 "큰아기"로 남는 미숙함보다는, 남편의 온갖 배신과 체면손상에도 불구하고 "나와 빌은 서로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고 있으며, 서로 이해하고 서로 받아들이며 서로 사랑합니다!"라고 선언하는 여성상이 여성해방에 기여한다면서, 팔루디는 힐러리의 처신을 "미국의 모든 여자, 어머니, 아내, 자매의 승리"라고 간주하였다.


슬기롭고 부지런한 아내를 묘사하는 성서의 구절(집회 51,13-30)이 지금은 우리 귀에 마치 기둥서방의 한심한 소망처럼 들리겠지만, "여성적인 것만이 세상과 인간을 구원한다."는 괴테의 고백이나, 온갖 짓을 하고 돌아와도 받아들여지기 바라면서 "솔베지의 노래"에 매달리는 유치한 남성들의 어리석은 꿈도, 인류가 보고 들어온 성모님의 지혜와 어렴풋하게나마 결부된 것이 아닐까?


성모님의 마니피캇을 자주 염송하노라면, 내 개인의 삶이 저 노래 그대로이고 한 민족의 역사가 그렇고 인류의 역사가 그렇다는 신적인 지혜를 짐작케 된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는 일이야말로 전능하신 분이 신앙인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해 주시는 큰 일이 아닐까?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루가 1,48-49)

[야곱의 우물 1998년 5월호 ]

 

 

3. Raniero Cantalamessa, "내 영혼이 하느님 안에 기뻐 뛰나이다”

    (2006. B. Assunzione di Maria Vergine al cielo)

    Il mio spirito esulta in Dio

 

8월 15일은 교회가 성모님이 몸과 영혼을 두루 갖추고 하늘에서 영광을 입으신 신비를 기념한다.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의하면 마리아께서는 영혼만 아니고 온전한 사람으로 천상 영광에 들어가셨다(동방교회도 이것을 교리로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스도 다음으로, 장차올 부활의 영광을 미리 입으셨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민족들의 빛」에서는 “예수의 모친은 이미 영혼과 육신으로 영광을 누리고 계심으로써,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시며 시작이 되신 것처럼, 이 지상에서는 주의 날이 올 때까지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시로서 빛나고 계신다.”(68항) 라고 하였다..

 

이 축일의 복음으로 선정된 구절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다. 복음은 유명한 마니피캇 찬미가로 끝난다. 마니피캇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세상과 그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양식이라고 단정할 만하다. 하느님은 주님으로,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동시에 나의 구세주로, 드높으시고 초월자이심과 동시에 당신 피조물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 가득하신 분으로 나온다. 그 대신 세상은 슬프게도 권세 있는 자와 비천한 자로 갈라져 있고, 부요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으로 갈라져 있고, 배부른 사람과 주리는 사람으로 갈라져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뒤집어엎기로 작정하신 것으로 나와 있다. “권세 있는 자들을 끌어내리시고...” 마리아의 노래는 어쩌면 복음서의 서곡에 해당한다. 오페라가 시작하면 그 줄거리와 모티브와 중요한 아리아들이 서곡에 한꺼번에 나오듯이, 복음서의 “참된 행복”이 여기 씨앗처럼 간추려져 있다. 후일에 당신 아드님의 입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주리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전개되어 나올 것이다.

 

마니피캇에서 마리아는 당신에 관해서 얘기하신다. 당신이 장차 세세대대로 영광을 입으시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고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행복하신 분이신지는 우리가 목격 증인들이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신음 속에서 마리아만큼 우리가 많이 이름 부르고 사랑하는 분이 과연 누구인가? 인간들의 입술에서 그 이름만큼 많이, 빈번하게, 사랑스럽게 뇌어진 이름이 과언 어느 이름인가? 이미 영광이 아닌가? 그리스도 말고 과연 어느 피조물에게 사람들이 이보다 많은 기도, 이보다 많은 찬가, 이보다 많은 성전들을 바쳐 올렸는가? 어느 얼굴이 이보다 많이 그려지고 새겨지고 동상으로 만들어졌는가?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마리아께서 당신 입으로 하신 말씀이다. 달리 말하자면 성령께서 그분을 두고 하신 말씀인데 과연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셨다.

 

우리도 어느 덧 마리아의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고 있다. 그분이 하늘의 영광중에 우리를 잊으셨을까? 구약의 에스테르를 보자. 왕궁에서, 그 화려한 궁중생활에서 모두 잊고 지낼 만했지만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임금에게 간원을 드린다. “드디어 내 사명이 시작하는 것 같다. 내 사명이란 내가 주님을 사랑하듯이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일이다. 영혼들에게 내가 걸어온 작은 길을 가리켜 보이는 일이다. 하느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내 낙원은 세상 마칠 때까지 이 지상에서 보내는 일이다. 그래도 내가 내 하늘로 옮아가는 것은 지상에 선익을 하고 싶어서다.” 이것은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마리아의 역할을 자기 몫으로 삼으면서 결심한 말이다. 마리아는 하늘에 옮겨가신 것은 지상에 선익을 끼치기 위함이셨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목격하는 증거다.

 

8월 15일 경축일에 마리아 대축일을 거행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모두 휴가 가고, 어쩌면 일 년 중 가장 속되게 보내는 기간에 말이다. 의미가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 사람들이 휴가를 맞아 산과 바다를 찾아간다. 아름다운 것을 찾아간다. 성모승천대축일은 의무축일을 지내라면서 우리의 휴가철과 아름다운 자연과 유적을 찾아가는 관광을 가로막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아름다움에 시선을 그치지 말고 그 너머로, 훨씬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눈을 들어 올리라는 초대이다. 시간이 흘러도 자연의 위력이 사라져도 여전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여름철에 성모 마리아를 생각하는 일은 우리에게서 또 다른 아쉬움 내지 슬픔을 덜어준다. 언젠가 우리 눈이 저 아름다운 자연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게 영영 감기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다른 아름다움을 향해서 눈뜨리라는 희망이 있다. 마리아께서 이 승천일에 들어가신 곳에 바로 그 아름다운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