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1. ㉯ 그들이 예수의 눈과 마주쳤을 때 (1994. 1.16: ㉯해 연중 2)

2. ㉰ 카나의 혼인잔치 (l980.1.20: ㉰해 연중 2)

3. ㉯ R.Cantalamessa,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2006. ㉯해 연중 2)

 

 

1. 그들이 예수의 눈과 마주쳤을 때

 

"그들은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떼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 1,35-42)

 

그렇다! 모든 만남은 “운명적”(fatal)이다. 원어 그대로 풀이하면 “치명적”이다. 하느님과 만남은 더욱 그러하다. 하느님께서 입술을 숯불로 지져 버린 이사야, 양떼를 몰고 다니다 야훼께 사로잡혔다는 트코아의 양치기 아모스, 하느님께 사기 당했다면서 울부짖던 사나이 예레미야, 주는 것 없이 미운 니느웨가 구원을 받을까 야훼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고래 뱃속에서 하느님께 손을 든 요나... 그들이 하느님과 처음으로 맞닥뜨린 그 순간은 치명적이었다. 헤어날 수없는 분(그분은 전능하시다!)의 손아귀에 들었고 그래서 그들의 인생을 망쳤으니까 말이다.

 

그날 그들은 스승 요한과 함께 서 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스승의 한 마디에 그 이상한 사나이를 따라나선 요한과 안드레아, 형의 말을 듣고 끌려간 시몬 게파(“바우”), 수입도 짭짤한 세무서장 자리에 있다 난데없이 불려 간 마태오, 예수께서 일곱이나 붙어 있던 마귀를 쫓아 내주셔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게 된 막달라 마리아, “야곱의 우물” 가에서 유대인 사내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 예수쟁이를 잡아들이라는 사전구속 영장을 가지고 가다 다마스커스에서 예수께 걷어 채인 사울... 그들이 나자렛 예수와 눈을 마주치게 된 것은 결정적인 실수였다! 단 한 번의 인생이 사그리 거덜 났으니까 말이다.

 

중세의 저 칙칙한 암흑 속에서 정의로운 도덕의 나라, 그리스도교다운 도시 국가를 꿈꾸었던 사보나롤라(그는 교황에게 가난을 설교한 죄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 당했다.), 하느님의 어릿광대가 된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찾아내려 했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자 마르틴 루터, 농민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아 주려다 루터에게마저 욕을 먹고 살육당한 독일의 뮌쩌... 그들이 복음서로 도금(鍍金)되지 않은 참 예수를 만났던 그 순간은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제 눈에 안경”이라는 속담이 있다지만,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그 저주스러울 만남을 그들이 잊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백세가 다 된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쓰면서 주님을 처음 뵈었던 그 시각을 대략 오후 네 시쯤이었다고 기억하듯이... 그래서 그들에게 주님과의 만남은 모두 은총인가 보다. "아무렴 어때요? 모두가 은총인 걸"(Qu'est que ce la fait? Tout est grace!)(베르나노스, 「시골본당신부의 일기」 마지막).

 

세례자 요한은 알고 있었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누군가 왔다! 요르단 강으로 세례 받으러 오는 그 많은 무리 속에서 요한의 눈은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선가 본 듯한 사내가 나타났고, 그 순간의 신비로운 체험은 그를 멍하게 만들었다.

 

이튿날, 바로 눈앞을, 자신의 애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는 요한의 앞을 바로 그 사내가 걸어가는 것이었다. 요한은 그를 뚫어지라고 바라보다 뭐라고 외치고 말았다. 두 제자가 놀란 눈으로 그 사내와 스승을 번갈아 보고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저 갈릴래아 사람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다시는 자기한테 돌아오지 않았다. 노아의 방주에서 날려 보낸 까마귀처럼...

 

그러면서 요한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였다. 폭군 헤로데와 그 주변 인물들이 자기에게 쏟아 붓는 증오를 보더라도 자신은 머지않아 자기 목이 족발집 돼지머리처럼 쟁반에 담겨 폭군의 잔치 상에 오르리라는 것을, 그렇게 자신의 운명은 끝장이 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저 사나이가 하느님 뜻을 펴리라는 것을, 자신과 다르지 않는 운명을 가리라는 것을, 하지만 야훼의 뜻에 의해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력이 무릎을 꿇는" 아드님이 되시고 자신은 구세사의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지리라는 것을...

 

"그래 나는 들러리지. 신부를 차지하는 것은 신랑이야. 예쁜 암양을, 민중을, 하느님의 백성을 차지하는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는 혼자서 중얼거리며 광야로 물러갔다.

(1994. 1.16: ㉯ 연중 2)

 

 

2. 카나의 혼인잔치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다." (요한 2,1-12)

 

프레데릭 오자남은 '빈첸시오회'를 만든 평신도 운동의 기수요,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교수를 지낸 지성인이다. 그의 친구로 당대의 이름난 신학자 라꼬르데르 신부는 오자남이 늦도록 총각으로 지내자 부디 신부가 되어 훌륭한 주교가 되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오자남은 예쁜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다. 라꼬르데르 신부는 기대가 꺽인 나머지 "불쌍한 오자남! 그 사람마저 덫에 걸리다니!"라고 한탄했다. 이태 후 라꼬르데르는 로마에 가서 비오 9세를 뵌 자리에서 교황께 꾸중을 들었다.

 

"이봐요, 신부님, 제가 듣기로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은 일곱 성사라고 합디다. 그런데 당신은 얘기를 바꾸어 놓았소이다, 그려. 당신 말대로는 예수님이 여섯 성사와 덫 하나를 제정하신 셈입니다. 아니올시다. 신부님, 결혼은 덫이 아니고 크나큰 성사올시다."(요한 바오로 1세의 연설)

 

예수님이 나자렛 이웃 동네 카나촌에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혼인잔치 상에 앉아 계시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어머니도 오셨지만 부엌에서 일손을 돕느라고 분주하시다. 신랑 신부의 화사한 자태며, 온갖 손님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는 예수님의 머리에는 "하늘나라는 혼인잔치와 같으니..."라는 멋진 설교 착상이 떠오른다(마태 22. l-l4).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겨레를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신랑의 애정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예수님께 실감이 간다. 당신도 흥에 겨워 신랑 신부에게 진심으로 축원을 보내는데 어머니가 부르신다. 뒤꼍으로 나오라신다.

 

"손님이 너무 많다 보니 술이 떨어졌구나. 너까지 여남은 장정을 몰고 왔으니..." 아드님이 뭐라고 투덜대는 말씀은 아랑곳 않으신 어머님은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예수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이르시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리신다. 너만 믿는다는 말씀에는 하릴이 없다.

 

돌 항아리 가득 찼던 물들이 사람이 되시어 그윽이 내려다보시는 창조주의 시선에 새색시보다 훨씬 새빨간 얼굴이 되고 말았다(풀톤 쉰).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초대하여 부줏술 열두 동이를 받은 혼인식은 고스란히 성사(聖事)로 높여졌다. 가나안의 기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제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혼인을 신비라고 했고(에페 5, 32), 결혼을 예로 들어 그리스도와 교회의 심오한 일치를 가르쳤던 것 같다.

(l980.1.20: ㉰ 연중 2)

 

 

 

3. Raniero Cantalamessa,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2006. B. II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Ecco l'agnello di Dio! Giovanni 1, 29-34

 

오늘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하시는 세례자의 말이 나온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그렇지만 성서에서 어린양은 순하디 순하고 무죄한 존재를 가리키는 상징물이다. 누구한테도 해악을 끼치지 못하고 오로지 당하기만 하는 짐승이다. 첫 독서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흠 없는 어린양”이라고 부르면서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셨다.”(1베드 2,23)고 한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무죄하게 고통을 받는 대표적인 분이다.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이야말로 “무신론의 반석”이라는 말이 있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있고나서 이것은 더욱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 이 주제를 둘러싸고 쓰인 책과 연극은 무수히 많다. 마치 재판장석에서 “피고는 일어나 보시오!”하는 재판관의 준엄한 호령이 들리는 듯하다. 이 경우에 피고는 하느님이시다. 우리의 신앙이 피고석에 앉는다. 그럼 우리 신앙은 뭐라고 대답할 말이 있을까? 신앙이 있든 없든 이럴 경우에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신앙이 고통을 해명하지 못한다면 이성은 더욱 해명하지 못한다.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은 너무도 신비스럽고 순수한 것이어서 우리의 빈약한 설명에 들어오기에는 너무 지독한 현실이다.

 

예수님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이런 설명을 내놓을 만한 분이셨다. 나임의 과부의 고통을 두고, 라자로의 누이들의 설음을 두고 당신도 감동을 하고 울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무죄한 고통을 두고 나오는 그리스도교 답변은 어느 이름 하나에 달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다. 예수님은 고통에 관한 박식한 설명을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말없이 그 고통을 당신 어깨에 짊어지려고 오셨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짐으로써 저 속에서부터 그것을 바꾸어버리셨다. 저주의 표지에서 구속의 도구로 바꾸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차원을 고통에 부여하셨다. 원죄 이후에 인간 피조물이 나타내는 위대함은 죄악을 가장 적게 범하고 죄 값을 가장 많이 치르는 데 있다. 그러니 무죄와 고통이 상관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여기 하느님께 다가가는 고통의 신비가 있다. 사실 하느님이 고통 받으신다면 그 고통이야말로 가장 무죄한 고통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무죄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그치지 않으셨다. 새로운 능력을 거기 부여하셨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에서 무엇이 흘러나왔는지 보자. 부활, 인류 전체를 위한 희망이 생겨났다. 그럼 우리 주변을 살펴보자. 장애아를 낳은 부모, 평생을 침대에 붙박이로사는 자식을 낳아 받아들인 부모의 영웅심을 보라. 주변에서는 얼마나 대단한 연대감이 드러나는가! 달리는 숨겨지고 말았을 위대한 사랑이 거기 나타나지 않던가!

 

무죄한 고통을 두고는 설명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 우리 행동과 태만으로 그것을 증대시켜서는 물론 안 된다. 그래도 무죄한 고통을 배가시키지 않으려는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미 있는 고통은 감소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추위에 덜덜 떠는 소녀, 굶주림으로 우는 아이를 보고서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 “오 하느님, 어디 계십니까? 저 무죄하고 불쌍한 아이를 위해서 왜 아무것도 안 하십니까?” 그에게 하느님이 이렇게 대꾸하셨다. “물론 저 아이를 위해서 뭔가 했고말고. 바로 너를 만들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