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

 

1. ㉮ 신앙은 투기라서... (l978.11.19: ㉮해 연중 33)

2. ㉯ R.Cantalamessa, “그날이 오면...” (2006. ㉯해 연중 33)

 

 

1. 신앙은 투기라서...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어서,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 25.14-30)

 

성서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라 한다, 머리를 끄덕거리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금언명구가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에 일대일의 시비(是非)를 붙이는 말씀이다. 따라서 어디에다 인용을 하고 사람을 훈계하기 위해서나 겨우 성경을 뒤적거리는 일은 매우 어리석다. 더구나 누구한테나 찍어 붙여 욕하고 비난하고 단죄하려고 성경 말씀을 끌어대는 일은 너무도 위태하다.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는 예수님 말씀은 공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다. 나는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다. 그래도 변통은 해서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저 자는 무엇이람? 한 탈렌트도 건사를 못하고 저렇게 닦달을 받는 꼴을 좀 보라지..." 이런 생각은 되도록 삼가는 편이 이롭다. 한 탈렌트를 받았다가 주인의 질책을 받는 사람은 우리 모두의 신세이기 때문이다.

 

세례 때 받은 은총(교리상으로 '상존은총'이라 일컫는다)을 고이 간직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늘 일하시는 분이시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시다. 그렇다면 한 탈렌트(요새 돈으로 백만 원 단위란다.)를 이자 한 푼 안 붙여 둔 종이야말로 악하고 게으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낙원의 태평성대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다. 한번 받은 은혜를 때 묻지 않게 고이 간직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유감을 당하지 않고 귀찮은 문제에 부딪치지 않고 순탄하게 사는 사람이 복 많은 것이 아니다. 헐벗은 거지가 지나갈 때, 내가 부리는 사람이 생활에 쪼들려 기진함을 알 때, 내 동료가 부정과 불의에 희생당함을 보고 들을 때, 집권자들과 재벌들과 그 패거리가 이 나라를 뿌리째 썩혀 쓰러뜨림을 두 눈으로 목격할 때, 나는 어떻게 하는가? 성당에 들러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랫사람들에게서 착취한 돈을 교회에 헌금하고, 이 나라와 동료를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맡기고 나면 양심이 편해지던가?

 

신앙은 투기요 모험이다. 하느님이 셈을 하실 때는 원금은 물론 이자와 소득을 따지실 것이다. 내 개인의 구원, 내 양심의 평안만 얻는 뾰족한 수는 없다. 하느님의 백성은 함께 멸망하거나 함께 구원받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l978.11.19: ㉮ 연중 33)

 

 

3. Raniero Cantalamessa, “그 날이 오면...”

(2006. B. XXXIII Domenica del Tempo Ordinario)

In quei giorni…

 

연중 마지막 주일을 한 주일 앞두고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그리스도교가 생긴 이래 어느 시대나 복음서의 이 구절을 끌어다 동시대의 인간들을 위협하고 겁주는데 써먹고 불안과 정신병을 유발하는 고약한 인간들이 없지 않았다. 내가 할 말은 이 구절을 듣더라도 마음 놓고 안심하라는 것이요 우주 종말을 얘기하는 이 내용에 조금도 혼겁하지 말라는 것이다. 복음서 구절의 마지막 절을 읽어보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신다는데, 종말이 어느 날 어느 시각에 온다고 떠벌이는 종파나 광신도들이 자기네는 그날과 그 시각을 알고 있고 자기들이 그것을 전파할 사명이 있노라고 외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어느 날 당신이 돌아와서 당신의 선민들을 사방에서 모으시겠다고 확약하신다. 하늘의 구름이니 태양이 어두워진다느니 별들이 떨어진다느니 하는 얘기는 그 당시 이런 사건을 형용하는데 쓰던 묵시문학의 유형이었다.

 

다른 면도 관찰해 보면 복음서의 여러 대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세상 종말을 우리가 얘기할 때, 특히 현대의 우주관을 갖고서 그런 얘기를 할 적에는 세상 종말에 모든 것이 없어지고 영원한 세계만 남으려니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성서가 말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종말이 아니고 상대적이고 역사적인 범주에서 종말을 얘기한다. 세상 종말을 얘기할 때에는 구체적인 세상, 일정한 집단들이 그 시대에 알고 있는 세상, 그들이 아는 범위에서 존재하는 세상이 끝난다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그야말로 “그들의 세계”가 끝장난다는 얘기다. 온 세상의 종말이 아니고 한 세상의 종말을 얘기하는 것이다. 둘이 서로 연관은 있지만 말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틀렸을까?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알던 세계, 유대세계는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종말을 보았다. 서기 410년에 반달족이 쳐들어 와서 로마를 점령하고 대학살과 약탈을 저질렀을 적에 많은 지성인들이 세계 종말이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 사람들이 크게 그르친 것은 아니었다. 한 세상이 끝나가고 있었다. 로마가 세운 세계가 그 제국과 더불어 끝나가는 중이었다. 따라서 2001년 9.11 테러를 보고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세상 종말을 떠올린 사람들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한 세상이 무너지는 모습이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일에 손을 놓으라는 징조가 아니고 더욱 진지하게 세상일에 책임지라는 가르침을 내린다. 또 세상이 언제 끝날 줄은 아무도 모른다고 오히려 안심하겠다는 사람보다 어리석은 인간도 없다. 우리 각자에게는 언제든지, 오늘 밤중에라도 종말이 올 수 있음을 잊은 소치다. 바로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복음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맺으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복음 말씀을 듣는 정신자세를 완전히 뜯어 고쳐야 한다. 세상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얘기하는 말씀을 전혀 다른 자세로 들어야 한다. 무시무시한 위협과 징벌을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끝났다. 그리스도인들의 “복된 희망”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는 희망(티토 2,13)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도 연관이 크다. 세상 종말을 설교하는 자들을 보면 흔히 아주 비뚤어진 종교심을 품고 있다. 세상을 모조리 때려 부수는 종말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느님도 언제나 화가 나 계시고 걸핏하면 세상에다 당신의 분노를 쏟아 붓는 그런 분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은 성서의 하느님이 아니다.

 

시편이 노래하는 하느님은 전혀 다른 분이다.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 끝까지 따지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신다. 우리의 됨됨이를 아시고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시편 103,8-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