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4년 10월 10일 목요일. 흐림
한글날. 한동안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었는데, 2012년에 다시 공휴일로 재지정되었다. 자기네 글자가 만들어진 날을 국경일로 정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서양 국가들이 모조리 '알파벳의 날'을 공휴일로 지킬까? 우리의 한글이 자랑스럽고 유명하지만 공휴일로까지 삼은 것은 훈민정음을 만들어 백성들의 글자를 읽는 문해율(文解率)이 오늘날 99%가 되게 만들어준 세종대왕께 감사하라는 뜻이리라. 실상 세계의 문해율 1등은 쿠바, 에스토니아, 폴란드로 99.8%란다. (우리 마을 여성 인구의 문해력은 30%나 될까?)
우리들이야 매일이 ‘노는 날’(everyday holiday)이지만 귀요미 미루가 현역이어서 ‘은빚나래단’ 모임을 어제로 주선하여 만났다. 금주에 ‘남해 형부’ 부친의 기일이 있어서 임신부님네 ‘가림정(嘉林停)’에 모여 연미사를 드렸다. 우리 모임에 사제 한 분이 계셔서 오붓한 미사를 드리는 것은 크나큰 특전이다. 모니카 언니는 이종철 신부님의 누이답게 우리의 미사 모임에는 언니가 성가대장이 되어 아름다운 음악으로 미사를 꾸며주신다. ‘독서’는 제일 젊은 이사야와 미루가 도맡고, 우리 둘은 ‘신자들의 기도’ 한 줄이나 바칠까 별볼일이 없다.
특히 기특한 건 임신부님네 개 ‘복실이’. 미사가 시작하면 방구석에 숨소리도 안 내고 엎드려 있다가 신부님의 강복에 이어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소리가 나면 당장 우리에게로 온다. 강아지도 미사 전례(典禮)의 순서를 파악하고 있는 걸 보면 ‘서당 개’3년이면 풍월하듯이 ‘신부댁 개’도 3년이며 미사를 드리나보다.
점심은 원지에서 샤브샤브를 먹고, 단성 묵곡 ‘생태숲’에 가서 ‘황토 건강길’을 걸었다. 여자 네 명과 이사야도 임신부님도 신발과 양말을 벗고 황토길을 걸었지만 보스코는 끝내 신발을 벗지 않았고 남해 형부는 우리가 벗어 놓은 신발을 지킨다는 핑계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보스코가 맨발로 걷기를 마다한 것은, 나중에 발 씻기 귀찮아서라나?
어려서부터 목욕하기를 그렇게나 싫어해서 엄마에게 회초리를 맞고서야 몸을 씻었다니 '세살 버릇'이 여든셋까지 간다. 엄마가 물 데워 함지박에 채워 놓고 씻겨주는데도 그렇게나 목욕을 싫어했다니... 지금도 아내에게서 협박에 가까운 잔소리를 듣고서야 마지못해 샤워실로 들어가는데 그것도 3분 안에 목욕을 마치고 나온다.
중고등학교 기숙사 시절 서양인 선교사님들의 위생교육에 따라서 여름은 말할 것 없고 겨울에도 매주 한 번 온수 샤워를 하면서(50년대 얘기다) 고급스럽게 자랐는데 물을 아끼는 뜻에서 7분 안에 목욕을 마쳐야 했단다. 수사님이 호르라기 불고서 7분이 경과하면 온수를 잠가버리니 동작이 느리면 그 추운 겨울에 냉수로 비누를 씻어내야 했을 터이니 지금도 보스코의 ‘초고속 샤워’에는 납득이 간다.
맨발로 흙의 감촉을 느끼며 땅 기운과 몸이 소통하노라면 ‘내가 흙으로 빚어졌다는’ 성서적 사실을 깊이 체감하게 된다. 막 걸음마를 배운 꼬마가 앙증맞은 두 발에 진흙을 묻히며 아장아장 걷는 모습은 또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공원에 피기 시작한 구절초도 예쁘지만 사람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다.
공원 산보 후 일행은 널따란 그 공원잔디밭에 깔개를 펴고 마련해온 과일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남해형부는 설암 수술을 세 번이나 받고도 우리 중에 말이 제일 재미있고 제일 많다. 한참 얘기를 하다가 동갑인 보스코를 건너다 보고서는 불평을 한다. “난 에너지를 써가며 열심히 얘기를 하는데 대사님처럼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으면 난 늘 손해보는 것 아니요?”라는 딴지로 우리를 한번 더 웃긴다.
월요일과 화요일 분 내 “휴천재일기”에 보스코가 사진을 올리던 어제 새벽, 사진이 첨부되지 않는다고 보스코가 투덜거렸다. 어제 오후 함양에 들러 ‘컴천지’에 노트북을 보여주니 한 시간 넘게 검사를 하더니 홈피관리회사(보스코가 쓰는 것은 '아이네임스')의 문제 같단다.
어제 밤 늦게까지, 오늘 아침 새벽부터 손을 써보았지만 보스코는 문제해결을 못했다. 오전에 서버인 ‘아이네임스’에 몇 차례나 전화해서 문제를 호소했다. 노트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고를 면할 수 있다. 오늘 오후에야 '아이네임스' 담당자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었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도 읍에 나가 어제 ‘컴천지’에 맡겨둔 노트북을 돌려받고, 경찰서에 가서 보스코가 신청한 3년 연장 면허증을 받아왔다. 갖고 있던 보스코의 운전면허증은 함양 경찰서에 반납했다. 그래서 그의 ‘장농면허증’은 2027년 12월 31일까지로 재교부되었다. 그도 뭔가 자격증 하나 쯤은 갖고 싶은가 보다.
저녁에 함양 느티나무독서회 윤희숙씨가 전화를 걸어와 소설가 한강 씨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해줬다. 시세말로 '김건희 대통령과 윤석렬 영부인(令婦人)'의 후안무치한 언행으로 대한민국의 국격이 땅바닥에 쳐박혔다는 허탈감에 국민이 고개를 못 들고 숨 막혀 있는 시점에서, 내 가슴이 탁 터지게 만드는 희소식이다.
"'광주의 딸'이 5.18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는 연약한 인성을 묘사한 공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여했다"는 평가가 눈에 띤다. 사회정의 구현과 남북화해 도모의 공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후, 호남인이 또다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나로서는 무엇이 그 역사적 고난과 차별 속에서도 호남인들을 세계적으로 뛰어오르게 만드는지 곰곰이 헤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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