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8일 화요일. 맑음
바쁜 일이 있으면 손이 먼저 나가고 장갑을 찾아 낄 시간 여유가 없다. 내 ‘승질대로’ 하다 보면 손은 늘 상채기 투성이. 팔은 자잘하게 긁힌 자국으로 가득하고 손가락엔 자주도 가시가 박혀 그때마다 보스코더러 빼달라 한다. 어제 아침에도 어제 밤송이를 맨손으로 만지다 가시가 박혀 알코올 솜과 바늘을 들고 보스코 서재로 갔다.
아내 손가락에서 '비접'을 빼는 그의 시술은 바늘 끝에 콧김을 쐬는 동작으로 시작한다. 알코올로 손과 바늘을 소독하라 해도 코밑에 바늘 끝을 대고 킁킁대는 의술은 먼 옛날 어머님이 하시던 바늘 소독이란다. 콧김으로 바늘 끝에 붙은 바이러스가 죽으리라는 생각은 어떻게 해냈을까? 코에서 소독 레이저라도 나오나? 나는 하늘로 눈을 들고 호소한다. “어머님, 아들 좀 말리세요. 위생교육이 안 돼 있어요.”
눈이 점점 안 보이는지 보스코는 돋보기 안경, 작은 확대경, 다음엔 큰 확대경까지 차례로 대서 '비접'을 찾느라 한나절. 그러고서 바늘로 적당히 뜨다 족집게나 엄지손톱으로 찝어낸다. 참 원시적이지만 아무튼 애정을 갖고 하는 일이라 가시 비슷한 게 나오고 비접든 자리가 안 아프면 시술은 끝난다.
바늘과 족집게로 헤집어 놓은 작은 상처가 가시보다 더 아프지만, 가시를 제거하고는 마치 큰 수술이라도 해낸 자랑스런 그의 표정은 할아버지가 손녀딸 돌봐준 눈길이다. 내 오랜 친구 영심씨는 우리 둘이 주고받는 언행을 평하여, 보스코는 나를 '손녀딸' 보듯하고 나는 보스코를 '막내아들'처럼 대한다는데 맞는지 말인지 모르겠다. 둘 사이의 호칭으로 따지면 우리 며느리는 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더니 큰아들 시아가 스무살 가까운 지금도 그 호칭이 여전하고, 나도 큰아들 빵기가 태어나자 '보스코'라고 부르던 호칭이 '아빠!'로 바뀌었는데 일흔다섯의 내 나이에도 그 호칭 그대로 그는 '아빠'다.
한때 “올 배추농사는 망했다!”고 엄살을 부렸는데 EM을 주면서 몰라보게 잘 자란다. ‘함양농업시험장’에서 만들어 농업인으로 등록된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미생물 활성액이라는데 어디에 무엇이 좋은지 모르지만, 물에 타서 요즘 1주일에 한번씩 주면서 병도 없고 진딧물도 없이 튼튼해진 걸 보니 사람으로 치자면 무슨 ‘보약’ 같은 건가 보다. 그보다도 병들고 시들었다가도 스스로 치유하는 초목들의 생명력이 놀랍기만 해서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문정리 아짐들의 지혜로운 터득에 해가 갈수록 공감한다. 엊저녁 산보길에는 가을걷이가 가까운 넉넉한 풍경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오늘은 전주 ‘초남이성지’에서 ‘큰딸’ 이엘리와 만나기로 한 날이다. 11시에 휴천재를 떠나 오후 1시에 성지에 도착했다. 엘리와 두 친구 꼴레따씨와 리나씨가 서울에서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이어서 밥을 먹으려 두리번거렸으나 주변에 식당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우리 넷 다 '살림하는' 여자들이라 싸온 것들이 있었고, ‘감춰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수천명을 먹이고 남았다’는 옛날 기적이 우리 넷에게도 일어났다. 그곳은 성지(聖地)였으니까, 더구나 복자(福者)이신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세 분 순교자가 손을 쓰신다면 여자 넷 쯤이야 거뜬히 먹여 살리고도 남을 터였다.
유항검과 아들 요한 그리고 며느리 이누갈다 세 순교자가 살던 집
유항검의 "교리당"에 오는 신자들에게 밥상을 마련하던 부엌(정지) 안에 샘이 있었고 그 샘이 지금도 남아 있어 "정지샴"이라고 부른다.
우리 넷은 순교자 유항검(아우구스터노)이 나고 자란 동네, 그분의 가족이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복음을 몸소 실천한 현장인 초남이성지를 돌아보고 기도했다. 특히 유항검이 가족과 식솔들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숙식을 제공하며 교리를 가르쳤다는 ‘교리당(敎理堂)’에는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세 분 순교자의 관이 모셔져 있었다. 우리 빵고신부를 위해 기도를 바치고 벅찬 가슴으로 생가터로 돌아왔다.
고맙게도 그곳 원장 도메니카 수녀님이 우릴 반기며 최초로 조선에 오신 사제 주문모 신부님이 넘어오셨다는 바우배기 유해발굴 현장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설명해 주셨다. 유항검 가족 일곱 분의 시신이 묻혔다가 20세기 초에 '치명자산'으로 이장된 원터다.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매장 표시 사발
사학죄인(邪學罪人)들의 시신을 쉬쉬하며 묻으면서도 무덤에 함께 묻힌 사발 바닥에 먹으로 쓰여진 윤지충 등 세 분 순교자들의 이름과 생년, 매장 연월일을 발견했을 때 발굴단이 느꼈을 감격을 우리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먼 훗날을 위해 망자의 이름과 성명(聖名: 지금의 '세례명') 생년 그리고 매장일자를 사발그릇 바닥에 붓으로 쓰고 재로 사발을 꾹꾹 채워 시신 곁에 묻는 지혜가 있었다.
전주에 왔으니 주교좌 성당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 전주 도심으로 들어갔다. 전동성당은 복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당한 터에 1908년 보두네 신부가 건립을 시작하여 23년만에 완공한 성당이다. 명동성당을 건축한 경험이 있던 프와넬 신부가 공사했기에 서울 명동성당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일반인들에게 성당문을 닫는 시간에 우리가 도착했지만 본당신부님과 관리인의 친절한 배려로 성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전주의 순교자들께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가자 지역의 민간인 학살, 허물어져 가는 대한민국의 시국을 하늘에서 보살펴 달라고 기도했다.
생각지도 않은 큰딸 이엘리의 주선으로 오늘 순교성지를 순례하면서 신앙의 선배들을 깊이 있게 만나고 오늘날 우리가 감수해야 할 순교에 대한 묵상도 했다. 함께 온 꼴레따선생과 리나선생이 동행해서 좋았다.
본당 관리인(살레시오 수사의 부친이었다!)이 소개해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엘리 일행은 서울로 떠나고 나는 전주-장수간 고속도로를 달려 휴천재에 도착하니 밤 8시. 보스코는 아내 없는 하루를 종일 책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씨름하다 아내를 반긴다, 누구 말마따나 손녀딸 귀가를 반기는 표정에 가까운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