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4년 9월 29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새벽 6시가 넘었는데 날은 깜깜하다. 추분이 지난지 한 주간. 한여름엔 5시가 안되어도 밖이 훤하게 밝아 왔는데... 무더위로 한참 번거롭던 여름이 지나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나도 여유로워진다.
해마다 텃밭 입구에 찬란하던 코스모스가 이번 두 번의 예초기 작업(경무씨와 우리 작은아들의)에 뿌리 가까이 그루터기만 남기고 험하게 잘려나갔다. 두 남자는 우리의 가을을 베어버렸고 마당 끝에 무성한 노랑코스모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날이 밝자마자 내려가 코스모스 대궁들을 모조리 뽑아내고, 휴천재 올라오는 길 화단에 무성한 잡초들을 뽑고 대빗자루로 마을 길을 말끔히 쓸었다.
새벽 작업을 하러 올라오던 한남댁이 “밭에 나는 풀이나 뽑지 왜 일을 만들어서 해요?” 라며 한 마디 한다. 농사일로만 평생을 바삐 살아온 아짐들에게는 마당이나 길가에 화단을 만들거나 푸성귀 아닌 화초를 심는 일은 ‘사서 하는 고생’으로 간주된다. 내동댁도 지나가다 아침부터 땀을 뻘뻘 흘리는 내 모습이 안됐던지 “와 서울에서 살제 촌에 와서 생고생이고?” 한다. “서울만 가면 여기 올 생각부터 나서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고 싶어지더라구요.” 라는 내 대꾸가 그미에게는 퍽 귀에 선가 보다. 동네 아짐들도 대처에 사는 아들네 집에 갔다가 서둘러 내려오고 말듯이, 내게도 정말 도시 생활이 갈수록 내게 낯설어진다.
오후에는 보스코를 앞세우고 송전길을 걸었다. 이젠 입맛도 되돌아오고 체중도 교통사고 이전으로 돌아왔다. 허리 받침과 지팡이도 없이 송전마을까지 갔다 오는 길이다. 걷는 속도는 느릿느릿하지만 이제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쉼 없이 걷는 모습이 거의 다 회복된 증거다. 사랑하는 사람이 쉰 해를 나란히 걷고도 지금도 살아 내 곁에서 걷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뿌듯한지 모른다. 그가 다른 사고를 치지 않도록 늘 감시하고 보호하는 일만 남았다.
어제 토요일은 매실청을 담은지 100일. 항아리에 담갔던 매실을 걸러내고 병병에 담아 숙성하라고 창고 어두운 곳에 갖다 두었다. 시골에서의 하루는 잠시도 쉴 여가를 찾기 힘들다. 오후에는 농업연구소에서 받아온 EM 비료를 물에 희석시켜 배추밭에 뿌려주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EM을 주기로 했고 어제는 유산균 제재를 물에 타 배추와 무 그리고 쪽파에까지 주었다.
속대궁이 파먹힌 배추속에 대궁이 새로 돋아나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식물도 생물이어서 벌레 먹혀 사라진 속대궁을 새로 만들어 올려 배추 꼴을 되갖추는 지혜를 돋보여준다.
어제 오후엔 문상마을로, 멀리 돼지막으로, 백연마을로 돌아 내려오는 길을 걸었다. 갈바람이 완연하고 지난 비에 쓰러진 벼를 빼고는 농사는 잘됐다 그 산보길에 유영감 내외, 마르타 아줌마의 남편 이정규 노인, 허노인의 부인 미카엘라(허은식씨가 입교한다면 미카엘이라는 세례명을 배정해놓고 있다)의 무덤, 그리고 옥구씨 산소 앞을 지날 적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 혼백들의 안식을 기원하면서 주모경을 바쳤다. 산봇길에 로사리오를 합송하면서 세상을 떠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각자에게 묵주알 한 알씩을 선물하는 일은 그들을 곁에 데려오는 강신술(降神術) 같다.
보스코가 월요일에 서울 갔다오다 죽암휴게소에서 놓고 온 핸폰이 어제 택배로 도착했다. 안에 있던 신용카드도 탈 없이 도착했는데, 전 세계적으로 이처럼 양심적인 나라는 많지 않을 게다. 택배가 서울집에 도착해도 (골목 맨 안쪽이긴 하지만) 늘 대문 앞에 짐을 놓아 두고 가는데도 아직까지는 아무 탈 없었다.
어제 토요일 서울 광화문을 비롯 전국 여러군데서 ‘윤석렬과 김건희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는 물결이 파도를 타기 시작했는데 이 한 몸 못 보탠 게 맘에 걸린다. 촛불시위가 재점화된 듯하다.
오늘은 남원 운봉성당으로 주일미사를 갔다. 내 아우님 윤희씨가 교적을 운봉으로 옮기고 그간의 쉼을 풀고 열심한 교우로 거듭나는 길이어서 격려 차 찾아간 길이다. 미사를 집전하는 새 본당신부님은 광주 신학교 다닐 때 빵고신부를 알고 있었다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도메니코 사비오’라는 세례명이 같아서 기억난단다. 성가대는 여전히 1당 100 큰 목소릴 내는 회장님이 맨 앞자리에서 ‘10인분 성가’를 부르니 성당 전체가 찌렁쩌렁 하다. 식구가 적으니 예전처럼 ‘낮밥’도 주어 이정석 신부님 계시던 시절이 그리웠다.
점심 후 정령치 가는 길, 구룡폭포 가까이에 윤희씨가 새로 연 공방("지리산 선물곳간" 또는 '수다쟁이 점빵')엘 갔다. 아기자기 꾸며진 모습이 딱 주인장이다. 윤희씨 가게는 봄여름에만 가게를 열고 겨울철엔 철수를 한단다. 일대에서 농장을 하는 스테파노씨도 만났다. 무척이나 순박한 사람이다.
운봉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영 갈계에 있는 한신 후배 강기원 목사님네 사과농장에도 들렀다. 사과 따고 선별하고 주문에 응하느라 한달 꼬박 부부가 고생하였고, 끝물이어서 지칠만도한데, 밝고 통쾌한 목사님 웃음소리에 맞추어 밝은 얼굴로 동고동락하는 목사 사모님의 노고가 고마웠다. 목회만으로도 힘들텐데 본인의 노동으로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가난한 목회자의 사모'로 부인이 한결 고귀해 보였다.
빨갛게 주렁주렁 열린 사과처럼 목사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하느님의 축복이 열매로 익기를 빌었다. 우리 부부더러 직접 사과를 따게 해 주고 딴 사과를 한 상자 채워 안겨주는 후덕한 마음이 고마웠다. 만나기만 해도 기분 좋은 지인들을 만나 실컷 얘기나눈 아름다운 하루였다.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게 분명 가을이 익어간다, 이 지리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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