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17일 화요일 한가위.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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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해가 구름 속에 쉬고 있으니 우리도 쉴 만큼 시원하다. 12시부터 비가 온다 했는데, 보스코가 비오기 전에 대추를 따자고 나선다. 대추 딸 때가 좀 지나 자꾸 열매가 떨어지자 보스코는 아깝다며 빨리 따자고 채근하며 앞장선다.


아들에게 "대추 좀 따자." 하니 "오늘은 바삐 할 일이 있어 도와드릴 수 없다."는 대답. ', 그렇구나! 이건 우리 둘의 일이고 아들은 할 수 없으면 안 해도 되는 거구나.' "그래? 그러면 아빠랑 둘이 할 테니 할 일 하셔!" 우리 노부부가 일어서자 아들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먼저 일어나 "아버지, 작대기를 휘둘러 따시는데, 허리를 심하게 쓰면 위험해요, 제가 할 게요." 라며 보일러실 지붕에 올라가 자리를 깔고 대나무로 두드린다. 싫다고 거절했다 아버지 말씀 따르는 성서의 비유에 나온 착한 아들이다. 성서를 따르는 걸 보니 역시 신부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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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대추알이 작고 단풍 들 때도 아닌데 잎이 싹 떨어졌다. 영양이 부족한가, 가지를 솎아줘야 했던가 모르겠고, 아마도 내년에는 센 가지치기를 해야 할 듯하다. 부자가 대추를 따서 거둬간 뒤 나는 식당채와 차고 지붕 위로 올라가 낙엽진 잎을 대빗자루로 쓸어내고 걸리적거리는 대추나무 가지는 좀 쳐냈다


지붕 홈통도 말끔히 치웠다. 지난번 홈통에 흙이 가득 차 식당채 지붕으로 물이 샌 적도 있다. ‘하수구 뚫기’, ‘연통 청소’, ‘홈통 치우기’ 등 제일 더럽고 힘든 일은 언제나 주부 몫이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의 '달리트 여인(불가촉천민)'은 내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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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딴 대추를 한데 모으고 정자의 테이블에 펼쳐 놓고 말끔히 골라내어 소쿠리에 담아 건네준다. 수돗물에 깨끗이 씻었으니 테라스에서 한 사흘 붉혀 스팀으로 찐 다음에 다시 말릴 생각이다. 대추차는 많은 지인들이 반긴다.


월요일 점심은 빵고신부가 집에 내려왔다고 미루네랑 산청에서 벙개팅으로 했다. 임신부님 오누이, 미루의 지인 '하동책방' 주인장도 자리를 함께 했다. 식사 후 두 집에서 챙겨온 후식으로 추석전야를 걸게 지냈다. 귀요미 미루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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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고신부가 몸이 불었다고 걱정들을 하기에 엄마로서 잔소리를 좀 했다. 그러고서도 저녁식탁에 감자구이, 호박꽃 튀김, 애호박 튀김과 맥주를 마련한 나는 본심이 과연 뭔가! 말만 잔소리지 행동은 줏대 없는 엄마 같다. 지리산에 명절 쇠러 왔을 때 "기회다!" 라며 이 악물고 굶겨야 하는데... 아들 말대로 '엄마가 단호하지 못한' 탓이란다.


진호가 명절을 쇠러 부모에게 와서 우린 그를 거의 10년만에 봤다. 그가 어렸을 적 어느 날, 내가 해 준 오므라이스를 맛있게 먹고 기분이 좋아 뭔가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던가 보다. "큰엄마, 이 담에 큰엄마가 밥 많이 먹고 뚱뚱해져서 딸을 낳으면 내가 커다란 집을 지어주겠어요." 라던 다섯 살짜리 꼬마가 어느새 나이 서른넷의 청장년. 걔의 서명까지 받아둔 약조문서가 어디 갔는지 찾아내 약속 이행을 요구해야겠다. 하기야 이 큰엄마가 밥을 많이 먹고 애를 낳는 일이 선행되어야 진호가 지어주는 커다란 집에 들어가 살 텐데...


"토오끼""산토끼"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1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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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이태석 신부 모친의 부고를 받고 갑자기 분주해졌다. 살레시안들은 동료 회원의 부모가 돌아가시면 회원들이 총동원되어 상가를 찾아가 연이어 연도를 하고 사제 회원들이 번갈아 연미사를 올리며, 입관, 출상, 장례미사, 매장을 모조리 책임지고 한다. 그것만 보아도 살레시오 수도회에 아들 하나 보낼 만하다.


추석에 돌아가신 분은 누구나 영원히 그날이 기억되려니... 모친은 103세로 돌아가셨는데 48세의 아들을 저승길 앞세우고 얼마나 긴 세월을 괴로워하셨을까? 이제야 하늘나라에서 아들 신부 만나 한시름 놓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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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추석. 몇 해 전까지 3형제가 지리산에 함께 모이던 우리 한가위가 집안의 이런저런 우환으로 각자의 집에서 명절을 지내는 중이다. 우리 부부와 작은아들 셋이 아침에 '한가위 미사'를 드렸다. 아들 신부가 와있어서 조상에게 드리는 음식제사 대신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미사를 올리니 얼마나 알찬 명절인가! 평소의 명절 식단을 포기하고 점심으로 빵고신부가 좋아하는 이탈리아식 요리로 밥상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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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분 차로 아들이 서울에 올라가는 길이라 함양까지 실어다 주었다. 강변역에 도착하자마자 장례식장으로 가고,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회의란다. 아들이 떠나간 이부자리를 거둬 빨래를 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우리 둘은 심해 밑바닥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는 물고기 한 쌍으로 변한다.


왕산 위로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이 위풍도 당당했다. 2024년 '가을밤(秋夕)'이 이렇게 시작했다. 아직도 삼복의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그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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