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8일 일요일, 맑음


목요일 내려와서 보니 마당 잔디가 뿌리가 드러나도록 비비꼬이며 말라간다. 어지간히 가물어 밭에 심어 놓은 배추 모종엔 매일 물을 주어야 했다. 드물댁이 배추는 심었겠지만 물까지 주라고 부탁하기엔 좀 미안했었다. 그래서 당초 서울에서 보내기로 작정한 한 주간을 못 채우고 닷새 만에 내려온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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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 사는 어느 귀촌인은 딸을 보러 서울을 가더라도 가져간 물건을 딸네집 문간에 내려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온다나? 지리산에서 창문을 열었을 때 그 신선한 공기와 풋풋한 풀냄새와 방울새, 휘파람새의 간드러진 인사가 반가운 지리산 새벽과, 아스팔트에 타이어가 긁히며 내는 매캐한 냄새와 자동차 엔진소리에 잠을 깨는 서울의 아침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우리 우이동집은 그래도 북한산과 도봉산을 낀 우이 계곡에, 더구나 도봉산 자락인 쌍문 근린공원에 자리를 잡았고 이층 베란다에서는 동남쪽으로 숲이 우거진 곳임에도 말이다. 정태춘씨 옛날 노래대로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이 서먹하여 석달만에 올라가더라도 서울집에서 머무는 날수가 갈수록 줄어든다. 지리산이 뿜어준 청정 공기에 맛들인 탓이다.


이번 전시회를 기념하여 정란순 화백이 기증해준 작품이 휴천재 현관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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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동서가 폐암수술 후 7개월 넘게 광주에서 몸조리를 하면서도 회복을 못 보던 차에 며칠 전 무등산 발치에 있는 '화순요양원'으로 자리를 옮겨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형님, 이젠 (건강을 되찾아) 살 것 같아요."하는 반가운 소식을 내게 전해왔다. 보스코가 근년에 여러 번 병치레를 하고서도 무난히 건강을 찾은 것도 지리산의 맑은 공기 덕임을 자타가 공인한다. 정말 이러다간 서울로 돌아가기 점점 더 힘들어지겠다


금요일 밤에 상당한 양의 비가 내렸다. 누렇게 쓰러졌던 잔디가 젤 먼저 몸을 추스르고 일어선다. 오그라든 배춧잎들이 편안하게 몸을 푼다. 온 천지 희푸르던 색깔이 하룻밤새 투명한 진초록으로 갈아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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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우리 텃밭을 갈고 고랑치고 멀칭하여 부직포까지 깔아놓고서 떠나며, 드물댁에게, '만일 나 없는 새에 굳이 김장을 심고 싶거든', 무씨는 한 구멍에 세 알씩만 넣으라 부탁했는데 한 두럭에 2000알의 씨앗을 다 심었단다. 한 구멍에 열댓 개씩 무 싹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미를 탓하지 못하는 건, 지난 봄 옥수수도 한 이랑에 모를 붓다시피 했다고 동네 아짐들이 흉보았는데 그럭저럭 그 이랑에서 자라오른 옥수수 행렬은 올 가을 나에게 200개 넘는 옥수수를 따 안겨 주었다.


한 이랑만 심으라던 파 씨를 두 이랑에 심었고, 두 이랑 심으라던 무는 한 이랑만 심었는데, 내년 봄 파값이 금값이 될지 누가 알랴? 내 부탁을 잘못 알아듣고 대충으로 해내곤 하지만, 휘어진 작대기로도 직선을 그으시는 분의 농사법은 평범한 농부의 실수쯤은 그럴듯하게 보완하신다. 말하자면, 드물댁이 어떻게 하든 하늘 농부께서 잘 되게 처리하시다 보니, 그미 손은 '복손'이다. 그미가 내게 미안해 하면 "아줌마, 잘했어요. 암시랑토 안 해요."라고 다독여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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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토요일 아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텃밭에 내려가 구멍마다 열댓 개씩 올라오는 무순들을 애기 포크로 파내서 싹이 안 나는 구멍, 옆자리 빈 이랑에 서너싹씩 나눠 심었다


이목사님이 준 눈개승마가 지난 달 무더위와 따가운 햇살에 전멸하여, 미자씨가 키워서 이번에 갖다준 그 모종을 다시 심었다. 그늘진 배밭에 자그만 모판을 두 개 만들고, 멀칭도 해서 눈개승마’를 옮겨 심었다. 비는 오지요 땀은 비오듯 흐르지요, 얇은 여름바지 위로 모기가 백 방쯤 물어대는 전쟁터였다. 모기쯤이야 아무리 물려도 긁지만 않으면 가라앉는 게 내 살성이어서 실컷 뜯어먹으라고 내버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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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점심은 원지에 있는 칼국수 집에서 미루네와 '벙개팅'을 갖고 먹었다. 아우 임신부님은 진주 가시고 미루가 가서 임봉재 언니만 모셔왔는데 모처럼 예쁘게 차려 입고 나와 찬사를 받으셨다. 보스코와 나란히 손잡고 걸어가는 모습은 여든 세 살 동갑내기 노치원(老稚園) 생도들! 언제 봐도 사랑스럽기만 한 '은빛 나래' 벗들이야말로 하늘이 이곳 생활에 내리신 가장 큰 축복이다.


인근 카페에서 환담을 나누는데 진주 가셨던 아우 신부님이 들러서 누나를 모셔가고, 우리 부부는 가랑비 뿌리는 샛강 길로 해서 돌아왔다. 샛강의 자작나무들, 전기줄에 한가득 모여 앉아 초딩교육을 받는 듯 소란스런 어린 직박구리들의 떼, 누렇게 패는 벼이삭을 넘보는 어린 참새들, 휴천강 물살에 외발이로 우두커니 서 있는 백로... 빗속에 모두 정겹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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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요일, 공소회장이 출타하고 없어 공소예절을 못하고 함양본당 미사에 갔다. 신부님이 교우들이 (추석맞이) 벌초들 갔는지 자리가 많이 비었네요.” 하며 서운해 하신다.


미사 후 우리 공소 식구들은 도정 이기자의 초대로 읍내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육회비빔냉면을 먹었는데 우리로서는 처음 먹는 맛이었다. 홍어나 가오리 회 대신 쇠고기 육회를 넣다니


읍에서 돌아오는 길, 9월도 중순으로 넘어가는데, 아직도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부지런히 이삭을 패는 논벼를 보며 너라도 더운 날씨를 덕보려므나!’고 축원해 주었다. 아래숯구지 마을 앞 문전옥답에서는 푸르고 푸른 잔디밭이 황금 카페트로 바뀌면서 이 한해도 벼와 함께 여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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