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3일 화요일. 맑음
우이동 집 달력이 방방에 아직도 6월에 멈춰 있다. 달력을 9월로 넘기며 “다음에 오면 12월이겠구나.” 이렇게 일년에 네번 달력 넘기기를 하고나면 한 해가 휘리릭, 선녀 옷자락이 바위를 스치듯 흔적없이 지나가고, 그렇게 우리는 영원의 문으로 종적을 감춘 뒤겠지. 우리에게 있는 건 이 소중하면서도 덧없는 시간뿐인데 그 간극을 무엇으로 가득 채울 것인가? 시간이 갈수록, 남은 시간이 적다는 게 생생해질수록 생각은 골똘해진다, 덧없이 흘려보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에도 병원순례차 올라왔다. 말하자면 그 일이 주목적이고 나름 내 지인들을 만나보는 것은 덤이다. 먼저, 폐암수술 후속 경과 살피고 3개월치 약을 타러 월요일 오전 보훈병원에 갔다. 아직도 너무 아파 응신이 어려운 동서 대신 찬성이 서방님이 광주에서 올라와, 월차를 낸 작은아들 하준이랑, 같은 병원에서 같은 시각에 같은 의사를 찾았다.
찬성이 서방님은, 전날 '폐암 수술 2주년'을 맞은 형님이 지난 4월의 교통사고로 다시 내려앉았다가 조금씩 허리를 펴는 도중이지만, 그런 사고를 치르고도, 어느 새 보조기나 지팡이도 안 짚고 걸어다니는 모양이 몹시 부럽단다. 동서가 수술한지 7개월이 지났는데도 보행에 어려움이 많고, 연상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 뭐라도 해주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데 음식이나 살림에 남자로서의 한계를 느끼며 속상해 한다.
하는 수없이 암요양병원에 아내를 보내기로 작정했고 화욜에 입원시킨다는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서민으로서는 그 또한 걱정이다. 주치의는 그럴 돈으로 차라리 집에 도우미를 들이고 안정된 자기 집에서 가료하라지만 동서 본인이 싫단다.
일요일 그림 전시회에 찾아간 '영등포아트스퀘어'에 어깨를 기대고 독도체험관이 있었다. 친일파가 정권을 잡자 독도는 일본에 넘기기로 이미 작정한듯(국토를 넘겨주는 자들은 매국노요 국사범이다!) 독도와 관련된 그 전시장까지도 철거한다고 나섰단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뜻이 있는 사람들 염려가 크다. 예전보다 더 많은 어른들이 아이들과 찾아와 독도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반 아이들을 인솔하고 와서 함께 공부를 하는 모습은 그래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윤석열 정부가 일제강점기를 자기네 원역사로 치부하노라고, 그때 조선인은 없었고 우리 모두 고맙게도 황국시민들이었다고 공공연히 발언하고 보수신문이 그 사상을 보급하는데 혈안이 된 요즘, 언제나 나라를 지킨 것은 힘없는 민초였고 왕실이든 양반이든 모두 오랑캐의 신하들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윤가가 5년간 나라를 이처럼 망가뜨리면 그것을 다시 바로잡느라 국민은 또 얼마나 고생할까 걱정이 크다. 거기다 ‘계엄령’까지 운운하며 군사반란 내지 검찰반란까지 걱정해야 하다니...
오늘 오전에는 '서정치과'에 가서 우리 둘은 스켈링을 했고 보스코는 충치치료까지 받았다. 30년지기로 우리 부부와 큰아들 부부, 그리고 두 손주까지 3대가 곽선생님에게 치아 돌봄을 받는 중이다. 곽선생님 외아들이 올여름 파란 눈의 헝가리처녀와 결혼했단다. 까만 머리에 파란 눈을 한 예쁜 아가가 나온다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스위스 사는 시아 시우도 언젠가 파란 눈에 금발 아가씨와 결혼한다고 나설까? 지구촌이 한 가족이고 인종들은 그만큼 사랑으로 맺어지는 가능성이 넓어지면서 세상은 그만큼 좁아져 간다.
몇 달 전부터 보스코가 목덜미에 뭐가 잡힌다는 말을 듣고 길 건너 '서울 봄 연합병원'에서 다녀가라 했다. 초음파를 보고 두부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이원장이 별다른 이상은 없으니 12월 보훈병원 가거든 CT 촬영을 부탁하라고 일러준다. 그런 진단을 받은 순간 보스코의 모든 걱정과 모든 병세는 사라졌다. 머리카락으로 뭔가 기어다니는 듯하고 머리카락에 거미줄이 낀 듯하다는 호소에는 머리를 너무 많이 쓰는 사람들에게 오는 증상이란다. 보스코 나이에 80년 넘게 써온 신체, 지금도 하루 열 시간 가량 혹사하는 두뇌인들 오죽할까?
저녁에 테너 강신옥 수사님(바로오회)이 '서울폰테앙상불'이라는 음악인 모임을 창단하고 "동서양의 만남 속으로"라는 제목으로 창단기념 음악회를 열고 우리를 초대하여 보스코랑 갔다.
내 페친 정란순 화백과 전은숙씨 부부, 김옥련씨와 친구들, 큰딸 엘리와 콜레뜨씨, 두레방 유영님씨와 우리집 집사 안젤라 등 많은 분들과 함께 갔다. 서양의 '벨칸토'와 한국의 '판소리'가 어울리고, 대금이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화 하모니를 이루는 연주는 대단한 혁신이었다. 특히 원장현 선생과 김경숙 선생의 대금 산조들은 물소리가 되어 우리의 영혼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서양식 교육이지만 우리 핏속에 흐르는 것은 '한겨레의 얼'임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밤 열시가 넘어 여의도에서 우이동까지 돌아오는 길, 세번씩이나 전철을 갈아타고 10분은 걸어야 하는 귀갓길을, 우리 늦둥이 안젤라가 배려해주는 카카오 택시로 편히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