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2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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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가려면 침대시트가 잘 말라 있어야 갔다 오더라도 묵은 냄새가 안 나는데, 금요일은 빨래하기 아주 좋은 날이었다. 테라스에 널어두니 뜨거운 햇살에 천이 부스러질 만큼 바싹 말랐다. 태양의 고마움을 빨래에서 나는 향기로 확인한다.


손님 대접하려고 전날 밤 해 놓은 티라미수(tirami su! ‘나를 끌어올려줘!’)를 꺼내 상온에 놓아두고 점심으로는 김원장님이 사주신 북어찜을 데워 먹었다. 보스코는 '생선은 말고' 시래기와 국물만 달라는데, 척추수술 후 그의 가늘어진 팔다리를 보면 프로테인 부족이 뚜렷한데 고기라면 육해공 다 싫다니... 속으론 당신, 순한 엄마 잘 만나 고생 않고 컸구려. 헌데 나 같은 엄마 안 만난 덕분에 식사 예절은 영 아니올시다.’ 빵기가 식사 때 옆에 있으면 나보다 더 아빠 교육에 열중한다. 그래선지 아들 말은 내 말보다 잘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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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두 시. 내 일기 페친 하모니카씨가 한국노동사회연구소박소장님과 함께 서울에서 내려와 휴천재를 방문했다. 서로 관심 있는 이야기를 묻고 대답했는데, 모니카씨는 사실 보스코가 번역한 고백록에 대한 얘기를 들으러 온 듯했다. 아무튼 사람이 오면 무조건 좋아하는 우리 부부 언행이 손님을 다시 찾게 만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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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분쯤 두 손님이 가고 보스코는 아픈 허리를 쉬고 나는 텃밭에 내려가 이튿날 서울 가져갈 푸성귀를 거뒀다. 루콜라, 부추, 호박, 오이, 가지, 고구마 줄거리, 고추... 대처에 사는 딸네들 찾아가는 친정엄마 행색이다. 그래도 옆에서 드물댁이 거들어 주니 훨씬 수월했다우리집에 손님이 왔다 간 줄을 아는 터라 드물댁이 손님이 집에 자꾸 올 때가 질로 좋은 기라. 울 시엄씨가 늘 그렇게 말했쌌는데, 증말 시엄씨 시상 버리고 나니 우리집 아무도 안 들여다보는데 못 쓰겠드만. 지금이 질로 좋다 맴 먹고 사쇼!”라는 격려사로 나를 다독여준다.


이튿날 서울 가져갈 것이 많은데, 혹시 잊어버리는 건 없는지 메모를 하고 확인을 하고도 새벽 두 시에 일어나 서성이게 된다. 보스코도 그 시간에 일어나 잠이 안 온다며 책상으로 간다. 어린 시절부터 저렇게 공부했으니 늘 전교 일등이라는 말을 들었을까? 하기야 혜화동 신학대학교에서 같은 공동침실을 쓰던 후배(이용훈 주교님)가 나에게 들려주던 말. “저 선배님은 내 침대 옆자리였는데 아침엔 늦잠을 자고, 오후엔 낮잠을 자고, 저녁자습을 마치고 침실에 올라오면 일찌감치 올라와 밤잠을 자던 분으로 기억 납니다. 그렇게 잠만 자면서도 공부는 늘 수석이라서 참 이상했어요.” 주교님 말씀이 칭찬인지 흉인지 잘 모르겠다.


오늘 전시된 그림 들 중에서 인상에 남던(화가 조금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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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토요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짐을 꾸리고 싣고 하고서 7시에 휴천재를 떠났다. 이번엔 모래내에 있는 호천네 집이 목표지점. 수원까지는 트래픽 전혀 없이 씽씽 달려왔는데 나머지 17km 가는데 1시간 반이 걸렸다. 아아, 서울의 교통지옥이며 매연이며 답답한 아파트들의 행렬이며...


올케는 정성스레 음식을 장만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천사처럼 착한 작은 올케가 나는 너무 좋다. 호천네가 누나 부부 산골살림에 필요하다며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서양 유제품을 잔뜩 줘서 받아안고 우이동으로 돌아왔다.


모래내에서 우이동으로 오는 길에 한목사도, 페친 이아녜스씨도 잠깐씩 얼굴을 보았다. 그새 머리가 꺼벙해진 보스코를 우리 동네 이발소 앞에 내려주고 산 넘어 '천주 엄마'한테 가서도 잠깐 얼굴을 보고 왔다. 산에서 나무만 보다가 한꺼번에 사람을 이리도 많이 보니 '문화회귀'가 한참 더디다. 주일에 바쁠 것 같아 토요 특전미사 겸 어린이 미사를 보았다.

보스코의 주일복음 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088


오늘 주일은 새벽에 마당에 내려가 풀을 베고 뽑고 가위로 잘라내고... ‘서울 가면 며칠 푹 쉬고 오라던 지리산 친구들의 축원이 이다. 우리 집사 안젤라가 정원을 잘 가꾸었는데 지금 막 꽃 필 벌개미취랑 범의 꼬리는 싹 뽑아버리고 바랭이는 잔디로 알고 잘 키우고 달개비는 사방으로 날고 있다. 자연 속에 살기 전 까지는 나도 꽃들의 제철을 몰랐으니 살면서 배워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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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점심상 차리는 일은 집사 안젤라에게 맡기고 나는 '20회 영등포미술협회 정기전'에 협회장으로 활약하는 정란순씨의 전시회를 보러 영등포에 갔다. 내 이름(順蘭)과 거꾸로 같은(蘭順) 분으로 나의 페친이기도 하다. 두 여자 다 빼어나게 이쁘게 그리고 순하게 살아가라는 부모님의 소망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인데 그 소망 대론지 모르겠다.


오늘 아침 우리집 마당에 가을꽃이 사라져 허전했는데 아름다운 뜰과 화려한 꽃이 그곳 전시장에 가득 피어 있어 오랜만의 문화생활을 즐겼다. 란순씨와 함께 ME운동하는 분들, 천경자 화백에게 사사한 화가들, 자기가 가르친 제자들과 지인들이 많이 와서 차분하고 넉넉한 화가의 성품이 돋보이는 전시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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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에 보스코의 벗 종수씨 부부가 집으로 찾아와서 오랜만에 환담을 나누었다. 부인이 케이크를 사왔는데 안젤라랑 함께 촛불을 붙여 끄고 먹다 보니 보스코가 폐암수술을 한지 딱 2년 되는 '기념일(?)'이었다. 종수씨도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다 죽음에서 돌아온 것이 37년전 일이다. 간당간당 이어지는 인간 목숨이어서 아내의 지극한 정성이 돋보이게 만드는 두 남자다. 


아랫 동네에 내려가 저녁을 먹고 헤어져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한 마을 사는 내 오빠(혼자 산다)도 찾아보고 수십년 서울집 수리를 맡아준 광민아빠도 잠간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석달 만에 한번씩 올라오는 서울 나들이는 지인들 얼굴 상봉으로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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