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4년 8월 29일 목요일, 맑음
휴천재 데크 밑에 숨어서 더위를 피하고 있는 제라늄이 계속 꽃대를 올리고 피우느라 너무 지쳐 있다. 힘내라고 EM거름을 조루에 희석시켜 뿌려주고. 그 덕분에 다른 화분들도 포식을 시켰다. 농협에서 배급 온 배추 모종도 영양실조인지 누렇게 뜬 상태여서 EM을 뿌려주었다.
텃밭 입구 음식물 쓰레기장에 한 해 동안 쌓인 음식 쓰레기도 이번에 퇴비와 섞어 밭에 뿌려준 터라 본 자리에 악취가 남아 거기도 EM을 뿌렸다. 같은 미생물일 텐데, 부패하는 악취가 나다 EM을 뿌려주면 전혀 다른 냄새, 일종의 향기가 나는 게 신기하다.
그러다 텃밭 네 귀퉁이에서 자라는 체리나무를 보니 그 밑에 잡초가 무성하다, 나더러 “어여 낫을 들어요!”라고 호소하는 눈치다. 풀들이야 내 시선이 닿자 으스스 몸을 떨겠지만. 어제 하루는 쉴까 했는데, 어느새 왼손엔 목장갑, 오른손엔 낫이 들려 있다. 텃밭 입구에도 헌 부직포를 마저 깔았다.
부산 본집에 갔다 돌아온 ‘도시농부’ 부부도 이른 아침부터 옆 논에 배추밭을 일구다가 인사를 건넨다. “아침마다 혼자서 힘드시죠?” “동네아짐들 형편이 다 같은 걸요. 그래도 나는 집에 돌아가면 밥 차려 줘야 할 남편이라도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게 얼마나 큰 힘인데요.” 어엿이 남편이 있는데 왜 혼자서 일하느냐는 질문이었는데 내 대답은 좀 엉뚱했을 게다. 물론 내 남편을 허리 다친 팔순 노인으로 잘 아는 사람들이지만.
휴천재 식당채 안팎에서 사철 꽃피우는 부감비
아침 일을 마치고 올라와 우물가에 선 채로 바지 위에 물을 붓고 세수비누를 문질러 빨래를 하며 흙물을 뺀다. 이 바지는 비닐로 되어 있어 아침 이슬도 배지 않고 특히 모기나 깔다귀가 침을 박지 못해 못 문다. 너무 땀이 차고 몸이 더운 게 단점이다. 샤워기로 비눗물을 흘려보내면 ‘황토강’이다.
나는 모기가 물어도 긁지 않고 참고 두면 얼마 후 가려움증이 사라지고, 깔따구도 보스코처럼 부어오르지 않아 한 이틀이면 사라진다. 그런데 나한테 젤로 고약하고 가려운 건 개미다. 이번에 배를 수확하여 감동 창고에 펼쳐 놓고 선별을 하는데 배봉지마다 몇 마리 또는 수십 마리가 드나들고 아예 배봉지 안에 일가를 이뤄놓고 살림하는 개미들도 있었다. 그럴 경우 자기들 삶의 터전이 박살나는 터라 개미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 일단 옷으로 기어오르면 질기게 집안까지 이불 속까지 따라와 곳곳을 물어댄다. 머리 속이든 옷 속이든 가리지 않고 분이 풀릴 때까지 물어대니 정말 징그런 놈들이다.
새벽 일을 마치고 아침 10시가 다 되어 집에 올라오니 보스코가 나를 반긴다. “당신이 약 먹으라 챙기지 않았는데 약 혼자 먹었다.” ‘어휴, 기특도 해라. 보스코 어린이 아주아주 잘 했어요.’ 심장과 폐 수술 후유증으로 아침 저녁 한 웅큼씩, 밤에는 전립선 계통, 밤새 몸을 긁으면 항히스타민계 한 알... 참 한국 제약회사들에 많은 이바지를 하며, 날마다, 그때그때 “여보, 약 먹어요!”를 안 하면 그냥 넘어가고 만다.
나이가 들수록 ‘손이 많이 가는’ 남자 티가 난다. 하지만, 아내가 챙기고 간섭을 안 했는데도 약을 혼자 챙겨 먹고 저렇게 자랑까지 하는 건, 아내가 눈에 안 보이면 그만큼 아내를 기다렸다는 얘기다. 내가 읍내를 다녀오느라 두세 시간 집을 비우면 보스코의 전화가 한두 번은 걸려와 내 안부를 확인한다. 아들네와 손주들이 오면 모처럼 노인이 되어 할아버지 노릇을 해야 하는데 우리 둘만 있으면 늘 신혼 시절로 돌아가거나, 아예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만다.
어제 오후에는 오이소박이와 양파김치를 담갔다. 서울 가면 호천네와 우이동 집사에게 가져다 줄 김치다. 우리 텃밭에서 아예 네 이랑을 자기 경작으로 분양받은 드물댁이 기분이 몹시 업되어 김치 담그는데 옆에 앉아 이것저것 손을 돕는다, 그러면서 그동안 있었던 동네 이야기를 전해주니 그것도 흥미롭다. 작은 동네에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데도 재미난 일들이 생기고 내가 마을회관에 못 나가는 터라 그미가 '아래숯꾸지 로이타통신'이다.
목요일 아침. 토요일에 서울 다녀올 때라 침대 시트도 갈고, 밤 기온도 가을 온도로 떨어질 테니 차렴이불로 바꿨다. 여름을 함께 보낸 누비이불은 세탁기 속에서 목욕을 하고 여름 한나절 햇볕 구경을 마지막으로 내년 길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또 한 여름이 갔다.
내년 농사에 쓸 퇴비가 알몸으로 쌓여있자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 한다. “저래 놓으면 햇볕에 봉지가 삭고 그리로 비가 들어가 거름이 젖으면 무거워져 그냥 들다 허리 나가요.” 오늘 아침 읍에 가서 투명 비닐과 천막 덮개를 사와 텃밭과 남호리 밭에 쌓아둔 퇴비를 덮고 묶었다. 100포를 주문하여 텃밭에 50포, 남호리에 50포 부려둔 터였다.
남호리 언덕은 신선초 꽃동산이다. 올해 꽃씨가 영글면 빈 자리에 뿌려 그 언덕 전부를 신선초로 덮을 생각이다. 성삼의 딸 수녀님들 장아찌 담게, 신선초 잎 마음껏 따가시도록... 초봄에는 장아찌 감을 제공하고 가을이면 노오란 꽃을 산비탈 가득 피우니 우리 나날도 신선초처럼 신선하고 튼튼한 삶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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