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1일 목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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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게구름이 양떼처럼 뜨기 시작했으니 장마는 끝났나보다. 기온이 3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를 연달아 맞다 보니 화분에 심겨진 꽃이 매일 주는 물에도 축 늘어져 있다. 이목사님 댁에서 얻어다 야심차게 텃밭에 이랑을 북돋고 심었던 삼나물 여린 싹들이 차츰차츰 말라 죽어간다. 매일 물을 줘도 그때뿐 소용이 없다.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집을 비울 수 없어 여행도 못 간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반려견 땜에 집에서 꼼짝 못한다는 사람들도 있듯이...


텃밭 일을 조금이라도 면제받으려면 텃밭의 경작을 누군가와 나눠야겠다. 그래서 어제 잡초를 뽑을 때도 반만 뽑고 나머지 절반을 드물댁에게 넘겼다. “우리 농사 지을 자리는 내가 풀을 뽑았고요 아줌마 꺼는 아줌마가 알아서 하세요.” 했더니 새벽같이 와서 말짱하니 다 뽑았다요.”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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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어람댁이 자기 땅 한 뙤기를 드물댁더러 부치라고 내주더니만 "땅 준 재세로 자꾸 허드렛일을 시킨다. 내년부턴에 안 부치겠다."고 선언해왔던 참이다. 그런데 지난 봄 드물댁이 앓아 누운 동안 어람댁이 그 땅뙤기 바로 옆에 사는 동호댁에게 부쳐먹으라고 땅을 넘겼던가 보다. 병원에서 퇴원한 드물댁은 '자기 땅에' 딴 사람이 고구마순이랑 들깨를 심었더라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입으로는 그 땅 안 짓겠다 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던가 보다. 남녀를 불문하고 시골 농부들 땅 욕심, 땅 사랑은 극진하다. 우리 텃밭 한 귀퉁이가 자기 몫으로 지정되자 '드물댁 밭'은 새벽 같이 깔끔해졌다.


어젠 보스코가 면허증을 갱신하러 읍내 보건소에 가서 '치매검사'를 하고 '건강검진(시력과 청력)'까지 받았다. 75세 이상은 2년마다 면허를 갱신해야 한다니 나도 이번 면허가 만료되고 나면 '고령자 운전제한'에 걸린다. 45년 고참 운전자에겐 참 성가시겠다


시골에 살면 교통편이 제일 어려운데 운전을 안 할 수도 없고, (우리 둘 중 누구 하나가 꼭 운전을 해야 한다면) 그게 바로 나다. 평생 한번도 운전을 안 하면서 보스코가 저 '장롱 면허증'을 왜 갱신하는지 모르겠다. 드물댁이 농사지을 생각이 없다고 공언하고서도 어람댁 땅을 동호댁에게 빼앗겼다고 억울해 하던 심정과 통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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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네 손주들이 방학을 맞아 2주간 '지리산 할메집'에 놀러왔단다. 찾아갈 '시골집 할메'가 있다는 것도 도회지 애들에게는 복이겠지만, 마냥 받아주는 할메 마음은 천국이리라. 남보기에는 이 삼복더위에 데리고 초딩 손주들 놀리 먹이고 보살피느라, 그렇잖아도 뼈만 남은 그미가 걱정스럽다는 스.선생. 갓난이 손주가 딸을 고생시키면 손주녀석도 미워 보이더라는데, 손주들이 아내를 고생시키면 그 녀석들도 미워 보이는 수가 있나 보다.  


읍내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도 스.선생 '솔바위'에 올라가 카레 점심을 얻어먹고, 산속에 살며 찾아오는 사람을 맞는 애환을 서로 나누었다한참 나이엔 그토록 수월케 해내던 일들도 나이가 들면 힘들어진다. 당연한데 현실을 수긍하기 힘이 든다.


요 며칠 따 모은 오이가 열댓개가 넘었다. 부추도 곱게 잘 컸다. 엊저녁에는 부추를 베고 오이를 따서 오이소박이를 담갔다. 빵기네가 서울 와서 먹게 양파 김치도 다시 담갔다. 손주들에게 뭘 해줘야 할까 생각이 많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정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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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살레시오 관구에서 수도회 역사를 정리하는 윤만근 신부가 보스코와 인터뷰를 하러 서울에서 온다 했는데, 그가 도착하고서야 아차! 하고서 부랴부랴 스파게티 소스를 데워 마카로니 한 접시와 김치만 달랑 내놓았다. 부엌 실내 온도가 40도를 넘어가니 오늘은 내 머리가 반쯤 익었던 것 같다.


보스코가 살레시오 수사로 있을 때, 60년대에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어느 역사적 사건을 듣고 정리하여 기록하는 책임을 윤신부님이 맡았나 본데 보스코는 그 사건의 전후 못지 않게 그가 살레시오회에서 평생 입어온 은혜를 얘기하는데 더 열심이다. 누군가에게 입은 은덕을 늘 고마워하고 그런 마음을 수시로 표현하는 모습은 인생의 아름다운 피드백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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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선배 경희 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쓰러져 10년 가까이 병원 신세를 지셨으니 본인이나 주변분들도 고생이 많았다. 그 고생을 보시고 이제는 주님이 편안히 쉬게 해주시기를.... 얘기 끝에 내 사랑하는 친구가 키플링의 시 천 사람 중에 한 사람은이라는 시를 읽었노라며 그 소감을 들려주었다.


10여년전 한신여동문들 모임에 참석한 경희언니(왼편에서 세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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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백아흔아홉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대로

너를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그 천 번째 사람은 언제까지나

너의 친구로 남으리라....


태양이 비칠 때나 눈비가 내릴 때나

구백아흔아홉 사람은 수치스러움과 모욕과 비웃음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천 번째 사람은 언제나 네 곁에 있으리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내가 누군가의 천 번째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다. 누가 '나의 천 번째 사람'이라면 나도 그에게 천 번째 사람'이 되려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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