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8일 목요일. 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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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아침. 남원의료원에 가려면 서둘러야 했는데, 새벽에 일어나 뒤꼍 대나무밭 밑에 들어난 흙이 비가 많으면 흘러내리 것 같아 전날 이목사에게 얻어온 눈개승마모종을 군데군데 심느라 아침 식사부터 늦어졌다. 눈개승마는 뿌리가 실해 한번 뻗어 서로 엉키게 되면 웬만한 비탈의 사태도 막아내고 잡초도 기승을 못 부린단다.


요즘처럼 장마가 호우로 쏟아지면 오빠를 비롯 지인들에게서, 지리산에 산다는 이유로, 걱정스러운 문안전화를 많이 받는다. 그러나 우리집은 휴천강에서도 100여미터 위에 있는 산비탈이고, 집뒤가 논도 아니고 밭이어서 논물이 차 뒤꼍 축대가 무너내릴 염려도 없을 뿐더러 집터가 습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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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료원에 도착하니 11. 지난 4월 10일, 응급실에 도착해서 수술받은 일이 석달전이니 그간 치료경과를 확인받는 날이다. 정형외과 선생님은 오전 진료 환자들이 차서 오후 1시반에 오라는 접수부의 대꾸. '다음부터는 필히 일찍 올 게요. 단지 3개월 전 그분에게 수술 받은 척추가 잘 나았음을 보여드리고 감사 인사만 전할 게요.' 사정사정해서 오전 마지막 진료환자로 접수가 됐다


3개월 전만 해도 밤새 잠 못 이루고 고통스러워했고 밤에 너무 아파 병동의 기나긴 복도를 서성거리면 그를 뒤따라 한없이 돌고 돌던 기억이 새롭다. 새벽 한두 시에 앞뒤로 나란히 복도를 헤매던 부부를 병동 간호사들도 오래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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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밭 땜에, 사나운 승질 땜에 우리에게 미움받는 물까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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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이런 사고가 없기를 바라며, 요즘 그 허리로도 배나무밭에서 사다리를 타는 그를 보고 나는 맘에도 없는 협박을 한다. "제발 이젠 저 배나무에 대한 미련을 버려요. 봄에 배꽃이나 보거나, 배 먹을 생각을 말고 아예 잘라버립시다!" "... ..." "당신에게 또 사고가 난다면 저 배나무에 세워둔 사다리에서 날 거에요!"  "... ..." 올 가을에 사람 키 정도의 높이로 대대적인 가지치기를 해서 사다리에 오르지 않고 배농사를 계속하겠다는 것이 그의 속셈이다. 우리더러 지리산을 떠나 이제 그만 서울로 올라가라고 설득하는 지인들의 심정이 내게도 이해가 간다.


어제 저녁 배밭 옆에서 모종을 심으며 보니 얄미운 물까치들이 끊임없이 배밭을 드나드는데  미처 봉지에 싸지 못한 배를 쪼아먹는 것으로 그치고 있었다. 아직 봉지를 찢는 횡포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봉지 속의 배가 익지 않아서겠지만...


정형외과 김기남 선생은 보스코의 회복된 모습을 보고 좋아하며 허리가 아픈 것은 허리 주변 근육이 손실돼서니까 '몸통 운동'을 많이 하란다. 이제 걷는 일에다 몸통 운동까지 추가해야 하니 나이 들수록 걸어라는 주문이 늘어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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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이목사님에게 눈개승마를 세 판을 선물 받아 임실 김원장님한테도 한 판을 드리고 싶어 남원으로 오시라고 했다. 언제 만나도 반갑고 따뜻한 분이다. 당신도 내가 셀러리 모종을 봄에 미쳐 못 샀다니까 키워서 뜯어먹던 셀러리를 통째 파다 주셨다. 서로 내 것을 내놓으면서도 아깝지 않고 기분좋으니 이래서 친구가 좋다. 점심을 함께 하고 커피점에서 한참 한담을 나누다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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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니 4시가 다 되었고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는데 모종을 심기에는 딱 좋은 날씨다. 배나무밭 가까이 감자 심었던 자리에 잡초를 뽑고 거름을 뿌리고 밭 두 이랑을 일구었다. 지심 매기 싫어 멀칭을 하려다 그 나물화초는 뿌리가 서로 엉키며 크는 습성이라 해서 매일 하루 10분씩 풀 맬 각오를 하고 그냥 흙에 심었다. 잡초가 자라오르는 것도 자연스런 모습인데 인간 좀 편하자고 밭을 비닐로 도배를 하니 반성할 일이다


270개의 모종을 심는데 모기는 먼지처럼 일어나 날파리처럼 덤비고, 비는 후두둑거리고 아무리 모기 기피제를 뿌려도 여름 옷을 뚫고 꽂히는 모기의 침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일이 끝나도록 참고 견뎠다. 내가 낮에 심은 모종 위로 한밤중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 일은 얼마나 달콤한지! 모기떼와 깔따구한테 당한 집단폭행 정도는 벌써 잊은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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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목요일. 새벽에 텃밭에 내려가 보니, 어제 심은 모종이 어두움 속에서 심은 것들은 밤새 쏟아진 빗줄기가 거칠었는지 뿌리를 드러내놓고 두리번거리는 모양이 '거리의 아이들(street-children) 같다. 들고 간 포크로 구멍을 다시 파고 뿌리를 넣고 꼭꼭 눌러주고나니 장마의 빗줄기가 다시 쏟아진다. 갖고 내려간 소쿠리에 오이 가지 고추 토마토를 한 바구니 따서 빗속을 헤치고 집으로 올라왔다. 며칠 모은 오이가 열 개도 넘는다. 보스코가 치아가 부실해지며 요즘 씹기 쉬운 오이소박이를 잘 먹어 자주 오이 김치를 담근다.


한길사판 고백록』교정쇄를 하루 종일 붙들고 있던 보스코를 졸라서 저녁식사 후엔 문상마을로 올라가 한길로 해서 돌아오며 '로사리오 산보'를 했다. 로사리오 한 단 한 단, 묵주알 한 알 한 알로 사랑하는 이들, 고마운 이들, 안타까운 이들을 기억하여 성모님께 맡겨드리는 일은 참 경건한 보람이다. 


아직도 휘이적휘이적 힘겹게 걷는 보스코를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며 그의 나이를 셈해 본다. 그의 동창들이 올리는 단톡방에는, "20년 후 2044년 달력에는 101일부터 109일까지 9일 동안 연휴다! 이런 연휴는 단군 역사상 처음 있는 장기 연휴이니, 그때까지 부디 살아서 그 연휴 즐기자!"는 우스개가 떴다. '매일이 휴일(every day holiday)'인 노인들이 20년 후면 100세가 넘는데 그 휴일에 무엇을 즐기시려는가? 나도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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