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9일 화요일. 장마비
산속이라 밤공기가 차서 평소엔 여름에도 창문은 닫고 잔다. 그런데 요즘의 열대야에는 창문을 열고 잘 뿐더러 어젯밤에는 실내 온도가 26도나 됐다. 요즘은 날파리 하루살이떼의 계절이어서 불을 켜면 망문 사이로도 몰려들어와 아침이면 고 작디작은 생명체들의 집단 사망을 목격하게 되기에 가능하면 불을 켤 땐 더워도 문을 닫는다.
그 미물들의 장지葬地는 불 켜져 있던 창문 안팎이거나 외등이든 가로등이든 밤새 불이 켜지는 곳마다 바닥에, 주변에, 근방에 쳐진 거미줄에 그 짧은 삶의 흔적을 집단으로 남긴다. 어쩌다 살아남은 것들은 사람 어깨로 등으로 머리칼 속으로 스물거리며 돌아다녀 ‘벌레 싫어 시골 못살겠다’는 친구들의 탄식도 가끔 듣는다. 보스코는 모기나 깔따구에 물리면 최소 동전 500원짜리 붓기가 얼굴과 팔다리에 올라온다.
어제 오늘의 비는 장맛비지만 국지성에다 '게릴라성'이어서 개었다 흐리다 장대비에다 보슬비를 다채롭게 연출한다. 시커먼 구름이 지리산을 덮다 갑자기 해가 쨍쨍 나기도 한다. 집안에 있어도, 특히 밤이면 감동 옆으로 흐르는 도랑물이 소란한 강물소리를 흉내내며 흘러가는 음악을 듣는 것도 기분 좋다.
한여름 끈끈한 무더위에 불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고 잠이 들면 한밤중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 위에 잠든 내 얼굴에도 이슬비로 들이친다. 사방 열린 방문마다 뛰어다니며 닫지만 이미 바람의 춤사위에 놀아난 비는 창문 밑에 놓인 옷가지들을 모조리 적셔 놓았다.
한밤중에 바람비를 내다보며 서울 북가좌동 저지대에서 세 살던 이태를 생각한다. 비만 오면 불광천은 온갖 오물을 싣고 범람하고 우리가 세든 반지하는 그 흙탕물의 밥이었다. 첫해는 멋 모르고 그 지하에 한여름에 사서 가을에 말려 겨우내 때겠다고 연탄 700장을 사 놓았다 곤죽을 쑤었다.
아직 물에 젖지 않은 연탄 몇 장이라도 건지겠다고 그 무거운 구공탄을 베란다로 옮기던 그 밤, 빵기 바로 밑으로 터울져 태어나려던 아이를 놓치기도 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걔의 장성한 얼굴을 알아볼까, 사람은 임종 때에 순간적으로 어른이 되어 떠난다니까? 작은아들 빵고는 우이동에 와서야 들어섰다.
북가좌동 지하셋방은 워낙 저지대여서 부엌 연탄까스가 빠져나가지 못해 두 번이나 연탄까스로 중독되어 세가족이 다 죽을 뻔했다. 그때마다 3살짜리 빵기가 심하게 울어제껴 아기를 안고 마당으로 기어나와 쓰러져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래서 친정에서는 빵기를 ‘우리집 가스경보기’라고 불렀다. 내가 어미로 걔에게 한번의 삶을 주었다면 걔는 우리 삶을 두 번이나 연장해 주는 선물을 했다. 이렇게 부모 자식 간에 생명을 품앗이 하나 보다.
부모를 연탄가스 중독 사망에서 두 번이나 살린 빵기
그 주인집의 기억. 남편은 멀쩡하게 생겼는데 여자는 외모에서 남자에게 좀 떨어졌다. 그런데 실은 여자가 학력이 높고 허드렛일로 그 집을 먹여 살리는 사람도 아내였다. 복덕방 더부살이가 직장이던 남자는 무슨 열등감에선지 거의 날마다 부인을 두들겨 패고 심지어 2층 돌계단 위로 밀어 던져 여자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서도 도망 못하고 소리 없이 사는 게 이상했다. 그래도 공부를 잘 한다는, 한 점 혈육 아들을 키우고 공부시키는 모정 하나가 그 모든 수모와 폭력을 견뎌내게 만드는 것으로 보였다.
북가좌동 살던 집안을 찍어 남긴 유일한 사진(빵기친구 현배와)
나는 행여 보스코가 그런 남자의 언행을 배울까 빨리 이사 가자고 했는데, 보스코는 그런 명분에는 그저 웃어 넘겼다. 그집 반지하에서 두 해를 살고 우이동으로 이사왔고 결혼 후 5년만에 산 우이동집에서 50년 가까이 살고 있다.
북가좌동 사는 호천이 아파트가 그 동네 웃녁이어서 언젠가 우리가 세 살던 집을 찾아가 보니 그 집은 그대론데 집주인도 내가 알던 이웃도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시 유목민’의 삶이란 먹이를 찾아, 남편 직장 따라, 아이들 학교에 따라, 수완 있는 주부의 경우에는, 집 평수 늘이느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곳이 서울이다.
갓 이사온 우이동집(1977년)
작년에 다시 ㅅㄹ히지금의 서울집 (2024)
반면 우리 ‘서울집’이 있는 동네, ‘응답하라 1988’ 쌍문동은 어슷비슷하게 가난한 사람들이 집 한 칸 갖고 살아가지만 서울에서 땅값이 제일 싸서 더 이상 밀려 날 곳이 없어 그냥 맘 붙여 사는 동네다. 그러다 보니 올여름 장마도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평상에 모여 앉아 연탄 화덕에 감자탕이나 끓이며 한더위도 부채질로 넘길 게다. 아무튼 욕심도 꿈도 없이 그럭저럭 나와 비슷한 세월을 사람 냄새 나게들 살고 있다.
서울집이든 지리산 휴천재든 우리 집에 있는 가구나 가전제품은 주인 내외만큼 늙고 낡았다. TV는 안 켜진지 몇 해요, 에어컨도 모처럼 이번 무더위에 스위치를 켰더니 마루 에어컨은 'E1, 93'이라는 숫자만 번갈아 뜨며 작동을 않는다. 오늘 삼성 수리공이 수리를 하러 왔는데 리모콘이 아예 먹지를 않는다고, 배전판 전부를 교체해야 한다는 진단을 내리고선, 17년된 에어컨이라 전국에 수소문을 해도 배전판 재고가 한 개도 없단다.
‘그 부품을 다시 생산하려면 생산라인을 깔고 공장을 돌려야 하는데 삼성이 그렇게까지는 서비스를 않을 거에요. 좀 덥더라도 산속 공기를 믿고 선풍기를 돌리다가 비수기인 겨울에나 가서 새것을 사세요’라는 친절한 조언도 남기고 돌아갔다. 우리 두 늙은이 경제 사정까지 염려해선지 출장비도 안 받고 가는 서비스가 ‘눈물겹게’ 고맙달까?
다행히 보스코가 종일 일하는 서재의 벽걸이 에어컨은 작동을 한다. 우이동 시절부터 우리집을 고치는 사람들은 보스코의 서재는 '돈꽁장'이라고 부르며 각별히 난방과 냉방에 마음을 써주었다. 번역이 주업이던 시절에는 200자 원고지 한 장 한 장이 유가증권이었으니 그 방이 그런 별칭을 가질 만했다.
이렇게 비도 억세게 오고 가전제품도, '돈꽁장' 옛주인의 늙은 몸도 여기저기에서 망가지는 소리가 들리지만 아직도 우리 두 사람 대체로 멀쩡하니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 "주님, 한 평생 우리를 성하게 해 주소서." 아침기도에 나오는 기도문이 갈수록 간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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