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4일 목요일. 맑음


지리산의 일몰(조성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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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 일어나자마자 박쥐네 식구가 더 있나? 살아 있다면 가족이 얼마나 슬퍼할까?” 궁금해 3층 다락으로 올라갔다. 여명이 밝아 오는데 창문의 모기망에 어린 박쥐 하나와 더 어린 박쥐 하나 등 두 마리가 모기망을 움켜쥐고 있다! 미동도 없는 것으로 보아 죽었나? 아니면 밤새 어미를 찾다가 날이 밝자 지쳐서 잠든 것일까, 그것도 박쥐가 어둔 동굴 속 아닌 햇빛 속에? 어리고 가여운 그 두 마리를 보니 나는 영락없는 박쥐 가정 해체범(?)’이 되어 버렸다.


영장류만 손가락이 다섯 개인 줄 알았는데 박쥐도 발가락이 다섯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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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걱정만 하다 보스코더러 장갑끼고 올라가 박쥐 시체를 모기 망에서 떼어 버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걔들이 어찌됐나?’ 궁금해 다시 올라보니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고 3층까지 올라와 걔들을 모기망에서 구출하거나 해코지할 고양이나 다른 맹금을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행여 땅바닥에 투신이라도 했나 자갈밭을 찾아보아도 흔적이 없다.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살 길 찾아 새엄마 박쥐에게 입양이라도 간 걸까?


어제 오후에 경희공방 박사장이 하자보수공사를 해주러 왔다. 테라스 바닥을 지나는 썩은 홈통을 교체하고, 내가 지적하는 이곳저곳을 세심하게 손질해주니 고맙다. 열흘간의 미국 연수에서 돌아와 첫 외국여행의 감동에 아직 젖어 있엇다. 널찍널찍한 집터, 커다란 시골 저택들, 생존의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들과 산의 풍경에 이런 곳에서 금요일까지 지금처럼 일하고 토요일 일요일은 읍내광장에서 자화상이나 그려주며 살고 싶다라는 꿈이 생기더란다.


우연히 만난 우크라이나 처녀와 찍은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어느 학교 직원이자 미혼인 처녀가 맘에 들어 가이드에게 연락처를 찾아달라 부탁하고 왔다며 아직 미련을 갖고 있는 듯하다. 여기처럼 강도있게 노동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받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대도시로 가서 빈민가에 널브러진 마약 중독자들을 보니 이런 데서 어찌 사나 진저리가 쳐지더란다. 미국의 두 얼굴이다.


누구나 도전해 볼 수 있는 꿈의 세계면서도 냉혹한 천민자본주의 세계에서 돈 없으면 어찌 되나 체득하고 나면 그래도 인간 냄새가 나고 말과 맘이 통하는 내 나라가 뼈저리게 그리워지려니... 바이든과 트럼프의 며칠 전 대선 토론을 보며 저렇게 사람이 없나 한심한 나라로 보였다. 정말 토나오는 윤가나 한가가 있어도 이재명이나 조국이라는 희망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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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텃밭에서 연하게 자라오른 마지막 열무를 한 아름을 뽑아다 다듬어 절였다. 그 자리엔 여름 상추를 심었다. 특히 먹을 사람도 없는데 땅을 놀릴 수 없어 누군가 먹겠지?’ 하고 심었다. 내가 뭐 하고 있나 보러온 드물댁에게 누구네 부추든 좀 얻어다 달라고 부탁하고 보스코랑 저녁 산보를 다녀왔다. 늦었지만 열무 김치와 오이소박이를 담고 나니 자정이었다. 나처럼 하루 25시를 일하면 세상 어디 가서나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


2008년 7월의 손교수 가족의 휴천재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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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얼마 전 큰딸 동신이를 시집보낸 손윤락 교수 부부가 인사차 휴천재에 다니러 왔다. 보스코의 외대 제자로 그의 결혼을 주례하러 경주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1997~98년 보스코가 로마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그 부부는 로마로 우리를 찾아왔고 우리도 파리로 그 가족을 찾아간 적이 있다그때 신부 동신이가 네 살이었던가? 2004년 우리가 로마에서 대사직을 보내고 있을 적에는 그 부부와 두 딸 온가족이 찾아왔었다. 


2008년에 두 딸과 휴천재를 방문한 적 있는데 어린 시아를 안아주던 어린 소녀들이 큰딸은 지난 달 프랑스 총각의 신부가 되었다. 부모의 귀국 후 큰딸은 다시 프랑스로 유학 갔다 파리의 옛 동네에서 함께 자라던 초딩 급우를 남편감으로 만나 사귀었고, 파리 시청에서의 결혼식을 주례하던 부시장도  그미의 어린 시절 급우의 부친이더라나? 지난 달 손교수의 고향 경주에서는 족두리와 사모관대로 한국식 결혼식을 올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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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딸 동리는 아리따운 25세에 처녀가 되었단다. 부인도 애초 프랑스 유학의 목표대로 뒤늦게나마 국내에서 학위를 마치고 대학강의를 하고 있고, 손교수는 어느 새 정년이 4, 5년 밖에 안 남아 노년을 걱정하는 처지라나? 애들이 이렇게 컸고 제자가 정년을 앞두고 있으니 우리가 노쇠해간 건 당연한데, 왜 아직도 우리는 우리 늙음을 받아들이는 일엔 익숙해지지 않을까, 거울 속 내 얼굴을 날마다 보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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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무렵 손교수 부부는 지인을 만나러 하동으로 떠나고 보스코는 책상에 앉고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휴천재 마당 잔디를 깎으러 내려갔다. 내가 주부(主婦)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 주부가 휴천재에서 해고당하는 일은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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