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화요일. 맑음
소담정 도메니카와 주고받은 대화 한 토막. “텃밭이나 마당이나 집안이나 부엌이나 질서정연하고 먼지 하나 안 보이던데 그게 힘들지 않아요?” “난 그렇게 정리되어 있지 않은 걸 두고 보는 게 더 힘들어요.” “그럼, 절대 그렇지 못한 남편은 어떻게 보고 살죠?” “그냥 내가 해주는 게 취민가 봐요.” “그래요? 천생연분이시네요.” “... ...”
그미 말대로, 감자를 캐낸 밭이랑과 뽑아 내던진 감자 줄기가 사방으로 널브러져 있으니 내 맘이 편치 않다. 감자를 캐면 난 손톱만한 이삭도 주워 담는데 드물댁은 좀 건성이어서 그미가 지나간 고랑은 내가 또 한 번 더듬어 이삭줍기를 한다. 나더러 재미보라는 건지 그미는 올해도 감자 이랑에 많은 감자를 숨겨두고 지나갔다. 한 대야 수북하게 이삭줍기를 하고 나니 퍽이나 오지다.
금년에도 텃밭 자두나무는 농사를 망쳤다. 몇해 전 달디단 자두를 실컷 따 먹던 나무에 병든 자두 몇 알이 남았을 뿐 모조리 지루 떨어졌다. 우리 각자의 인생을 셈하면서 이렇게 지루 먹은 삶으로 헤아려진다면 참 허무하겠다.
굵은 감자는 따로 추리면서 잔챙이 감자들은 일일이 껍질을 벗겨 쪄내 올리브유에 돌려가며 구웠다. 영락없는 ’휴게소 감자.‘ 보스코는 저녁식사로 맛나게 먹는데 난 사흘 전부터 밥상에만 앉으며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 같다. 엊그제 감자 캐는 날 땡볕에 일하다 더위를 먹었나 보다.
위가 뒤틀리고 몸살을 하니 응급실도 의원도 없는 산속이라 보스코의 약손 치료가 응급조처를 대신한다. ’완죤 돌팔이‘지만 그 정성과 태도가 어찌나 진지한지 딱딱하게 굳었던 위장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면 남편의 의술은 일단 끝난다. '엄마 손이 약손이다.' '할매 손이 약손이다'는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은 50년쯤 함께 살다보면 ’남편 손도 약손‘이라는 믿음을 지니게 된다. 역시 세상에 제일 만만하고 편한 사람이 남편이다. 그대로 두면 젊어서부터 위경련이 되어 병원에 실려간 적도 몇 번 있었다.
어제 월요일 아침기도를 염송하는데 밤새 앓았던 후유증인지 나도 졸고 보스코도 며칠간 교정쇄를 보느라 쌓인 피로가 내게도 하품으로 전염됐다. 그가 '우리 아침 먹지 말고 잘까?' ’그러자.‘ 그렇게 침대로 가서 정신없이 두 시간 ’아침잠‘을 잤다. 아침은 11시에 먹고 점심은 3시에 녹두죽을 끓였다.
낼 모레 장마가 든다는 소식에 나는 식당채 지붕에 올라가 홈통 청소를 했고 보스코는 변함없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과 씨름을 재개했다. 각자 잘하는 일을 하면 된다. 그게 부부간의 평화를 이루는 길이다.
엊저녁 식사 후 산보를 문상 마을로 올라가 문상길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했다. 올라가는 길에 문상마을 강영감네 커다란 논 두 개와 밭 하나가 있다. 몇년 전 천여만원을 들여 작은 밭과 논을 경지정리 하여 기계가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논이야 기계로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한남마을 용한이가 짓는다지만 밭농사는 손이 많이 가 누구도 안 나선다.
인간이 욕심껏 무엇을 챙겨도 건강을 잃는 순간 모든 것에 의미가 퇴색된다. 감자골을 내고 멀칭을 하고 감자를 정성껏 심었지만 보스코가 교통사고로 눕자 그것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눈에도 안 들어왔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에 마음을 쓰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공부한 반년 세월이었다.
강영감네 돌담에 붙은 텃밭에는 매해 고추를 심었다. 그곳도 집주인들의 사정과 여실하게 올여름은 망추대만 가득 엉켜 흰 꽃을 활짝 피우고 있어 그 광경이 더 서글펐다. 내가 오늘 사라진다해도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 모두 타인들이다. 로사리오 기도에 '이제와 우리 죽을 때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들이다.
오랜만에 진주 헬레나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주변에 마음이 복잡한 친지의 일로 전화를 했는데, 타인의 일로 고민하는 그미의 모습이 아름답다. 많은 사람이 자기 일에 함몰하여 주변을 둘러보기 힘든 요즘 아닌가? 이런저런 핑계로 종교연대의 6.25 기념일 행사도 지나쳤고 윤가가 등장한 후 남북이 주고받는 게 고작 삐라나 똥자루라니 참 대단한 한민족이다.
오빠가 자기 건강검진으로 고민했었는데 어제 검사에서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타인을 생각하는 자리를 넓히면, 내 걱정을 할 자리는 그만큼 줄어드는데도, 내 일만 생각했다. 휴천재 입구의 두 그루 능소화가 왼편 나무가 꽃이 이울면 오른편 나무 꽃들이 한창 성세를 떨치는 풍경과 흡사하달까? 남 좀 더 생각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