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4년 6월 18일 화요일. 맑음
잠을 자도 가믐에 목말라 잎이 축 늘어지거나 오그라진 텃밭 식구들을 생각하면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밭에까지 호스를 늘여 매일 물을 줘야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 헌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물뿌리개로 돌아가면서 물을 준다.
이른 봄에 보스코가 여러 해 된 부추고랑를 옮겨 심어서 미처 뿌리를 못내린 채 거의 흔적이 없었다. 작심하고 한 닷새 김을 매주고 물을 주었더니 금새 깨어나 자기 존재를 드러내 보인다.
욕조 속에는 해마다 장구벌레가 생겨 모기떼를 걱정하던 차였는데 개구리가 그 속에 알을 까고 올챙이로 자라자 장구벌레가 올챙이 먹이가 되어 모기떼가 극성을 못 부린다. 물뿌리개로 물을 주다 보면 행동이 굼뜬 올챙이 몇 마리가 물뿌리개 속에 걸려 들지만 꽃삽으로 고이 모셔 욕조로 넣어준다. 동물들만 해도 뭔가를 잡아먹어야 생명을 유지하는데 식물은 물과 태양빛 만으로 목숨을 지키고 키워나가니 지상에서 제일 정직하고 바람직한 생명체들이다.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얼마 전 텃밭에 뿌려 놓은 베이질이 얼굴을 내밀고 이사갈 날짜만 기다리는 듯하다. 베이질은 옮겨 심어 거리를 주면 더 잘 큰다. 싹들을 들어내서 정자 옆에 앉아 상토와 흙, 유박을 한줌씩 섞어 베이질 싻 두개씩 옮겨 심었다. 열 개쯤 되는 화분이 자라서 양이 많으면 페스토 베로네제를 만들어 냉동해 두었다가 일년 내 먹어도 좋다.
진이네 화분에 작고도 예쁜 꽃이 피어 검색해 보니 ‘시스탄테 그란디플로라’(Cistanthe Grandiflora)라는이름이 뜬다. 꽃송이가 손톱보다 작은데 ‘그란디’라는 거대한 이름이 우습지만 너무 귀여워 화분 옆에 떨어진 새싹을 옮겨 심었다. 이러다 보니 전순란의 하루는 할 일이 없어 심심할 틈이 잠시도 없다. 보스코는 한길사에서 출판을 준비하는 『고백록』 교정지를 받고서 한창 바쁘다. 허리 통증으로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엊저녁에 보스코가 오랜만에 문상마을로 올라가 한 바퀴 마실을 돌았다. 윗동네 ‘이엄마’는 시골여인답지 않게 보스코에게 허그를 해주며 "교수님, 이번에도 살아 돌아오셨구먼요. 고마워요."라며 눈물바람에 반가움을 표한다. 그를 볼 적마다 친정 오라비 본듯 반긴다. 동네에서 80노인이 교통사고로 119에 실려가고, 그동안 잦은 병치레로도 소문이 난 터라 '요번엔 큰일나지' 싶어 아짐들 사이에는 "교수님 목숨이 간당간당하고 소대변 다 받아 낸다."는 소문이 돌았단다. 이래저래 보스코는 '징하게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에게 "사람은 오래 살라 문 요케 살아야 되는 기라."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나?
오늘 화요일. 아침 기온이 17도. 완전히 ‘산속의 아침’. 우리 둘은 엷은 오리털 파카를 찾아 입어야 했다. 그런데 웬걸, 낮에는 35도라는 한여름! 수시로 핸폰에 폭염경보가 뜬다. 새벽 공기로 집안을 식혀 놓고 문을 닫아 놓으니 집안은 25도를 유지한다. 침대에 누워 책을 보자니 그간 쌓인 피로에 잠이 솔솔 온다. 오랜만에 낮잠을 한 30분쯤 잤다.
길냥이들을 ‘집사’라고 부르면서 돌보는 광경이 페북에 자주 오른다. 휴천재 집사들도 점심 때면 식당채 뒤로 모여 들어 안주인의 손길을 기다린다. 음식을 내다주면 어미와 새끼 두 마리가 언제나 사이좋게 함께 먹는다. 거의 날마다 새끼 두더지를 한 마리씩 물어다 놓는 게 '우리 공짜밥 먹는 게 아니라구요!'하는 시늉이다.
오후에는 집안정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내일 박사장이 버릴 짐을 정리해주겠다니 그동안 못 버리고 끌어안고 있던 많은 잉여품들을 정리했다. 우선 식당채 부엌의 벽장에서만도 커다란 자루로 3자루나 골라놓았다. 빙수기계도 와플기계도 버렸는데, 그동안 쓰던 제빵용품들은 정을 떼지 못해 누구라도 필요하다면 줘야지 싶어 꺼내놨다 다시 챙겨 두었다. 파스타 미는 방망이, 빕스틱 두드리개, 이탈리아 요리하느라 이탈리아에서밖에 구할 수 없는 도구는 버릴 수가 없었다. 손님이 앞으로도 그렇게 올 것인지, 예전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할 것인지도 분명치 않은데 아직도 이렇게 못 버리는 건 물건이 아니라 미련이다. 우리 나이에 미련을 못 버려 쌓아두는 일처럼 미련한 짓도 없다.
내일 아침엔 삼층 다락에 수십년 쌓아둔 이불들도, 해묵은 여행 가방들도 내려다 놓아야 할 게다. 버리는 데는 정말 용기가 필요하고 애착이 클수록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 더위에도 수국은 어찌나 물을 많이 켜는지! 오늘은 신수가 훤하고 밤사이에 송이들을 많이도 올렸다. 휴천재의 초여름은 능소화와 수국으로 화려하다. 말라서 사경을 헤메던 잔디도 저녁마다 물을 뿌려주자 초록으로 환생한다. ‘하느님, 당신 피조물들을 위해 비 좀 주십시오.’ 매일 같이 오후 세시에 소나기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목을 빼고 기다려 보지만, 함양읍내도 이웃동네 마천까지도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부었다는 소식만 들어와, 귀만 풍년이다. 요즘 사는 게 폭폭한 건 식물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