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11일 화요일. 맑음 


휴천재에 능소화의 계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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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배밭으로 내려간 보스코를 따라 나선다. 땡볕에 사다리에 올라가 배봉지를 싸는 일이 쉽지 않아 아침 일찍 작업을 하는데 요즘처럼 허리까지 성하지 않은 그를 혼자 하라고 하기엔 가혹하여 허리 삐꺽하지 않을까 계속 살펴야 한다싸는 봉지가 떨어져 오후에는 농협 자재상에 가서 봉지 한 상자를 더 사왔다한 상자면 스물 다섯 그루 배 나무 3년치 봉지다


보스코의 허리를 핑계로 내년에는 배꽃이나 보고 배농사는 포기하자는 내 주장에 보스코는 두고 보자며 확실한 대답을 않는다초겨울 배나무 가지치기부터 말려야 할 텐데책상 공부 외의 어떤 일에 보스코가 이렇게 열과 성을 기울이는 일이 좀처럼 없으므로 나도 완강하게 말릴 엄두가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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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산지 얼마 안된 우리 '아반테'가 어느 새 사방이 찰과상이다. 어제 인월 동아공업사에 차를 끌고가서 상처난 백밀러 견적을 받았다. 휴천재 구석에 세워진 공간으로 주차 후진을 하다 주차장 기둥에 부딪쳐 백밀러 끝의 꼬마전등이 떨어져 나갔다. 내 보기에 찰과상에 반창고 붙이는 정도의 수리 같은데 비용이 12만 원이란다. 50여년 운전 경력에 전순란은 아직도 빠꾸만은 자타가 공인하는 젬병이다.


1980년에 로마로 유학 가는 보스코를 두 아들 데리고 따라가기 전 내가 시작한 일이 세 가지. 첫째가 운전면허 따기, 둘째가 이탈리아 말 배우기, 세 번째가 수영 배우기였다. 면허증 따자마자 이탈리아 로마의 차선 없는 길에서 운전 실습을 시작했으니, 눈치 보며 끼어들기와 좁다란 골목길 주행에는 이골이 났다. 한 대 딱 들어갈 주차공간이면 앞뒤 차를 범퍼로 밀어가며 주차하기에도 도가 텄다. 로마는 중세도시이므로 당시 마차 두 대 비껴가는 포장도로를 남기고 집을 지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교통대책이었겠지만 "붉은 신호등은 빨리 지나간다!" "파란 신호등은 천천히 가도 된다!"두 교통규칙만 배워 익혔으면서도,  실제 운전은 "내가 안 지키니 상대방도 안 지키리라!"는 원칙은 항상 염두에 두고서 방어 운전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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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막 도착하여 세 들어 간 아파트는 로마 변두리 신축 아파트촌 공사장에 있어서 길에 공사중인 구덩이가 많았다. 하루는 아침에 애들 학교에 데려다 준다고 후진을 하다 1미터 넘는 구덩이에 차가 빠졌다. 기사는 이탈리아 말도 제대로 못하는 여자죠, 천하장사도 못 되는 남편은 학교 가고 없죠, 두 아이는 차 속에서 떠나가라 대성통곡을 하고 있죠....


유학하던 어느 신부님이 몰다가 선물하고 가신, 25년 된 오펠카데트(생전 처음 가져본 우리 자가용)를 그 구덩이에 그대로 묻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몰려온 아파트 공사 현장의 일꾼들이 동양 여자의 똥차와 서툰 초보운전을 즉각 눈치채고  대여섯 장정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와 차를 들어 올려 꺼내주었다. 이럴 때는 남편이 사라져 주는 게 도와주는 셈이다 그 자동차는, 밖에서 잔 비가 오면 차 바닥에서는 큰비가 튀어 들어오고 모터와 기어 외에 모든 것이 고장나 있으면서도 로마유학 4년을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했다(나머지 2년은 '피앗'의 Cento 127 중고로 유럽 전역을 쓸고 다녔다).


그런 차로 로마도, 나폴리도, 시칠리아도, 알프스도 멋대로 돌아다니며 운전을 익혔는데도 빠꾸는 지금도 젬병이니 50여년 운전 경력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래서 우리 큰딸이엘리의 후진 실력을 보면 주눅이 들고 만다. 아직도 빠꾸 운전'이 치명적인 까닭을 굳이 묻는 사람이 있다면 전순란 인생에 '빠꾸'는 없다!"며 살아온 배짱 하나밖에 댈 너스레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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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 왕마늘 꽃이 화려하게 피었다. 구장댁은 요즘도 새벽 일찍부터 논에 들어가 기계로 모를 심은 빈 자리에 모를 채워 쌀 한 줌이라도 더 거두려고 허리를 90도로 꺾고 있다. 어제는 저녁나절에 우리 남호리 신선초 밭을 둘러보았다. 신선초는 엄청난 기세로 비탈진 언덕을 채워가고 살아남은 호도나무들도 무성한 가지를 보이며 자라고 있다. 


요즘은 630분쯤이면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 씩 마을로 내려오는(정호승) 시각으로 지리산 하봉으로 넘어가는 해의 엷은 주홍색의 노을이 너무 곱다. 그 정경이 너무 좋아 새로 깐 테라스에 나와 저녁기도를 올린다.


우리가 어디로 선뜻 여행을 못 떠나는 이유가 마고할미가 보여주는 저 웅장한 아름다움에 푹 묻혀 하루하루를 보내기 때문이다. 저것을 다 내려놓고 서울로 옮겨가라는 주문은, 아직까지는, 좀 가혹하다. 어둠이 내리면 검은등뻐꾸기가 홀딱 벗고 홀딱 벗고”(스님들은 빡빡 깎고 빡빡 깎고라고 자기네를 놀리는 소리로 듣는다)를 노래하고 산비탈마다 밤꽃 향기가 무척이나 짙고 모심기가 한참 지난 무논에서는 늦총각 개구리들 목청이 유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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