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레시안 3대 신심의 새로운 음미
살레시오 가족의 평신도 차원 ⑤
SALESIO 가족 (2023.11 10~13쪽)
[잡지에서 읽기]
https://drive.google.com/file/d/1Z59FmTwYlz3DZwsqDJUrYz0ZZ2AyR9Xj/view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돈보스코 가족의 장래를 두고 수차의 총회와 최근 총장들은 교종들이 가리켜 보이는 ‘새로운 복음화’에 맞추어 한 군데로 방향을 잡았다. 비록 우리 귀에 설지만, ‘사회복음’이라고 일컫는, 성령의 새로운 모험을 따라가는 일은 수도자 개개인의 출신지와 가정 배경이라든가 개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이 얼마만큼 폭넓은 사랑을 담느냐는 영성의 문제라는 확신이다.
이런 신념을 회원들에게 남기고 보편교회에 봉사하러 떠나는 아르티메 총장의 2023년 ‘생활지표’를 함께 읽어온 글을 마치며, 살레시안의 영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3대 신심, 곧 성체, 성모, 교종에 대한 신심을 좀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본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때문에 안팎으로 ‘반대받는 표징’이 된 프란치스코 교종,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께서 ‘정의의 태양’이라고 호칭받으시는 사연, 성체성사가 ‘사회교리의 학교’로 불리는 까닭을 본다.
교종에 대한 돈보스코의 각별한 사랑
돈보스코가 살던 19세기는, 8세기부터 이탈리아 중부를 ‘교황 국가’로서 통치하고 유럽의 정치판도를 좌우하던 교황청이 이탈리아 통일로 사회적 기득권을 모두 상실해가던 전환기였다. 피에몬테를 장악한 사보이 왕가가 돈보스코의 교육활동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수차 암살객을 보내는 터에 그는 사제로서 성좌를 옹호하면서도 “내 정치는 십계명의 정치일 뿐이오.”라며 청소년 교육과 구제 활동을 지탱해갈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 위기에 처한 비오 9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를 열어 ‘교황 무류권’을 내세우며 ‘교황권’을 강화하고 가톨릭 지성계를 근대주의로 몰아 단죄하는데 몰두하여 교회사가들로부터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sensus fidei)에 따라 계시 진리를 펼치시는 ‘성령’의 위치를 교종이 독차지했다고 비판받았다. 150년이 지나 교종 프란치스코가 그때 손상된 교회의 ‘시노달리타스’를 회복하느라 2023년과 내년의 주교시노드 개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살레시오 중학교 졸업생으로 교종이 된 첫번 예수회원이면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한 베르골리오는 현대 가톨릭 3대 수도회의 영성을 한 몸에 수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우리는 “즐거움 안에 주를 섬기라!”는 돈보스코의 표어를 프란치스코 교종의 사목 문서들 제목에서 읽는다. 교황직 기조문서 「복음의 기쁨」(2013), 가정사목을 다룬 「사랑의 기쁨」(2016), 모든 신앙인의 성화 본분을 일깨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2018) 등이다.
교종에 선출되던 순간 동료 추기경이 그의 귀에 속삭이던,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마세요!”라던 당부에 따라 ‘지구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겠다고 나서자 교회 안팎에서 엄청난 쓰나미가 교종에게 닥쳤다. 제일 먼저, 당신의 교황직 기조정책을 담은 「복음의 기쁨」에서, 세계 금융시장과 대기업들과 다국적기업들이 이미 장악한 ‘신자유주의 경제’를 ‘살인경제’라고 공식 단죄하자 그 문서가 나온지 사흘도 안 되어 미국 언론인(Rush Limbaugh)이 교종을 ‘순 빨갱이(pure Marxist)’라고 지탄하였다. 중산층 가톨릭 신자들에게 “여러분은 ‘웰빙’ 차원에서 성당 나오고, 실상은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들 아닌가요?”(55)라고 지적하자 미국을 방문 중이던 교황에게 어느 가톨릭 신자(Judge Napolitano)로부터 ‘거짓 예언자’라는 돌직구가 날아왔다. ‘하나뿐인 지구’를 ‘공동주택’ 삼아 모든 생물이 함께 살아남자고 호소하는 「찬미 받으소서」(2015)를 내놓자 미국 폭스뉴스가 교종을 ‘지구상의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명했다.
세계 경제를 손에 쥔 자들이 가난한 백성들을 학살하는 살인자로 지적받자 자기들이 장악한 언론과 사법부를 총동원하여 가톨릭교회의 아킬레스건을 물고 늘어졌다. 전 세계에 몰아치는 ‘가톨릭 성직자의 미성년자 성추행’ 보도와 검찰 조사(70년 전 일까지)와 교구들을 파산내는 보상금 책정이 바로 그 복수로 보인다. 윤선규 주교의 추기경직 고사도 그 폭풍의 일환이다.
어디 그뿐인가? 15억 가톨릭 신자도 일반인들만큼 이혼한다. 그들이 재혼하면 ‘혼배조당’으로 신앙생활이 끊기고 그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교종은 ‘교회 안의 가난한 죄인’으로 몰린 이혼 가정의 사목 문제 해결에 교황직 10년을 할애했다. 돈보스코께서 물려받은 살레시오 성인의 ‘양선함’은 교종직 표어“가엾어서 택하노라(miserando atque eligendo)”에도, 그분의 화안한 미소에도 나타나지만 이혼자 사목을 다룬 「자비의 얼굴」(2014), 「온유한 판관이신 주 예수님」(2015), 「자비와 비참」(2016), 「하느님 얼굴 찾기」(2017)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세계주교대의원 임시총회(2014, 2015)를 열어 ‘이혼하고 재혼한 가톨릭신자들의 신앙생활’ 문제를 사목적으로 해결하자, 교황청내 추기경들과 고명한 신학자들이 들고 일어나 “자비가 계명을 이길 수 없다!”고 외치며 “프란치스코 교종의 이단사상을 바로잡자!”라는 운동까지 벌였다.
“주님의 여종” 이야기
바티칸궁에는 ‘왕홀(Sala Regia)’이라는 대접견실이 있고 신년초에 교황이 주교황청 외교단을 맞는 하례식이 거행된다. 교황청의 역사적 위업을 그린 대형 프레스코 중 파올로 베로네세가 그린 “레판토 해전”은 신년하례식에 그곳에 온 아랍국 대사들에게는 퍽 껄끄럽다. 이슬람의 유럽 정복을 저지했다는 저 해전(1571)에서 사라센 병사들이 ‘죽는 건 조조 군사’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건에서 ‘그리스도신자들의 도움’(Auxilium Christianorum)이라는 성모 호칭이 생겼는데, 하필 돈보스코 가족의 성모 공식 호칭으로 받들어져 왔다. 돈보스코의 손으로 지어져 이 성모님께 바쳐진 토리노 대성당 제단화에는 성모님이 왼팔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오른손에 왕홀을 들고 계셔 아드님이 어려서 대신 섭정하는 분처럼 그려져 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1티모 2,5)라는 구절을 아는 개신교도들은 이런 그림에 고개를 갸웃뚱한다.
성경에서 마리아는 당신을 ‘주님의 여종’으로 자칭하셨지만 창조 받고 구원받은 인류가 하느님 앞에 내세울 자존심으로 성모 공경이 활발해졌다. 무엇보다도 "마리아는 가장 완전한 자유의 표상이며, 인류와 우주의 가장 완전한 해방의 모습"(자유와 해방, 97)이기에 그 많은 성당, 그 많은 성화상이 그려졌다. 교종 베네딕토 16세는 성무일도에서 우리가 저녁마다 염송하는 ‘마니피깟’(루가 1,47-55)을 “성모님 영혼의 초상”(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41-42)이라고 불렀다.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영성체송에는 "마리아여, 당신은 정의의 태양이시나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하면 “마리아의 모성적인 염려는 지상에 사는 인간들의 삶의 개인적인 측면에도 사회적인 측면에도 두루 미친다.”(사회적 관심, 49) “그이의 보살핌이 개개인의 사정과 영신적인 이익에만 미치지 않고 빈곤, 실업, 식량 부족, 무기 경쟁, 인권의 경시, 국지분쟁 또는 전면전쟁의 상황 내지는 위험 같은 사회상황과 국제위기에까지" 미친다(49).
예수님의 나자렛 회당 설교는 말하자면, 구세주의 소임과 정책을 공표하는 취임사였다. 설교단에 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너졌을 때 두루마리를 펴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는 구절을 보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어머니의 마니피깟의 영향을 받았음이 한눈에 보인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런데 이렇게나 반갑고 놀라운 소식에 고향사람들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났다.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 어째서 ‘가난한 이들’, ‘억압’, ‘해방’ 따위를 입에 올리냐는 반발이었다.
성찬의 성사는 사회복음의 학교
주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하시던 말씀.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고린 11,23-24) 수도자라면 매일 미사참례하지만 알아듣기 팍 힘든 구절이다. 당신의 운명을 함께 하라는 뜻으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핵심 구절을 가톨릭신자들은 한때 공동번역본의 오역에 따라 “이 예를 행하여라”로 읽고서 ‘미사참례하고 영성체하면 끝!’이라고 편히 살아왔다.
경건한 신자들, 특히 독신의 수도자들은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는 사도의 경고 때문에 모령성체(冒領聖體)를 매우 두려워한다. 이 대목의 조금 위(17-22)를 보면,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짓”이란 6.9 게명이나 주일미사 빠진 문제가 아니라 “저마다 먼저 자기가 가져온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하는” 분배정의 문제였는데 교회는 그것을 안 가르쳤다. 요한복음이 빵의 기적에 이어 복음서 6장 전체를 할애하여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하시던 주님의 설교를 싣고서 정작 최후만찬에서는 건립성체를 생략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과 제자들의 세족례로 대체한 복음사가의 깊은 뜻을 교회는 헤아리지도 않았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시던 말뜻을 풀이한 것이 20세기 베네딕토 16세의 「사랑의 성사」(2007)에서 처음이었다니! 문서는 “이 성사의 신비가 사회적 특성을 지니고 있고... 성찬례는 더욱 정의롭고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촉구한다”(88) “성찬의 학교에서 양성된 그리스도인 평신도는 직접 고유한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지도록 부름 받는다.”(90)고 매듭짓는다.
‘사회복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대 받는 표징’
사제들이 성당에서 하느님 언로를 독점하듯이, 수도자들은 하느님 백성의 영성을 독점하고 있다. 교종은 누구보다 봉헌생활자들의 공감을 얻어야 하느님의 백성이 사회복음에 귀 기울이리라는 기대를 품고서 교황직 이듬해 ‘봉헌생활의 해’(2014)를 선포하고 “세상을 잠 깨우라!” 호소하고, 수도자들이야말로 ‘사회복음의 기수’임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갓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아기 엄마에게서 받아안고서 시메온 노인이 아기엄마에게 일러준 한 마디.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프란치스코 교종은 ‘사회복음’에 21세기 교회의 명운이 걸렸다고 본다.
그런데 어느새 신앙의 사회적 차원은 교회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반대받는 표징’이 되었다. 과연 한국교회에서도 ‘사회복음’이라는 말이 신앙인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는 중이다. 오죽하면 교종이 최근에도 “사회불의에 침묵하면서 내 영혼만 천당 가겠다는 사람은 마약중독자에요!”라고까지 일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