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4년 5월 26일 일요일. 개었다 흐리더니 가랑비 내리기 시작
금요일 새벽. 왕산 옆으로 해님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 엊저녁에 벌써 소독약 호스를 담장 넘어 배밭까지 늘여놓았고, 소독통은 전선을 꺼내 충전을 해두었다. 배잎이나 배알이나 적성병이 널리 퍼졌다. 나는 식당채 앞 수돗가에서 소독통에 물을 채우고, 소독약을 풀어 섞는다. 내 신호가 가면 보스코는 약치는 댓자루만 들고 병든 곳 성한 곳 가릴 것 없이 온 나무에 분무를 뿌려준다. 배나무의 올해 마지막 치료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폐교된 학교에 거창한 상나무가 열 그루 넘게 있는 한 적성병, 흑성병은 해마다 거의 필연적이다.
27일에 서울 가서 열흘 가까이 머물다 오면 적성병이 온통 나무와 배알에 퍼질 것 같아 보스코가 서둘렀다. 올해는 배 싸지 말고 과일 농사 포기하라는 내 말이 그를 되레 떠밀었나 보다. (일산 사는 내 일기 페친이 자기가 안 쓴다고 건네 준 전동 소독통의 역할이 참 크다.) 보스코의 다친 허리에 약통까지 멨으면 그도 나도 벌써 포기했을 꺼다.
그제 오후에는 그의 눈에 휴천재 두세 그루 매실이 띄었는지 ‘매실 따는 혁신적인 도구’를 제작한다고 오후 내내 파란망을 꿰매서 넓다랗게 연결하고, 양끝은 굵은 대나무를 양쪽에 묶어 족대처럼 만들더니 그물 한편엔 자루처럼 접어 매실을 드들겨 타작하더라도 마당에 떨어지지 않고 그 자루 속으로 들어가게 유도한다는데.결과는 예측 불가다. 밤에는 오이 소박이를 담갔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1분도 안 쉬고 일하면 꼭 지금의 나처럼 초친 몸이 된다.
토요일. 보스코가 매실을 따자고 새벽같이 나선다. 혼자 내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아 아침도 안 먹고 따라나섰는데 철학교수 성염의 신발명농기구 ‘매실따기 족대’는 실용상 그야말로 최악의 졸작 내지 실패작이었다.
때마침 아침을 일찍 먹고 산보 나온 드물댁이 구경하다 일손을 보탰다. 보스코는 장대를 몇번 휘두르다 허리가 몹시 아픈 표정이어서 얼른 이층 서재로 쫓아 보냈다. 드물댁과 나 둘의 작업이고 그미는 조수니까 거의 내 몫의 일이다. 보스코는 가끔 이층 테라스에 나타나 훈수 한 마디 하고 사라지곤 했다.
올해는 배 농사도 매실 농사도 패스하려 했는데... 보스코는 갈수록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노인 같다. 방상복 신부님이 세우신 엄마네 양로원 가훈이 "놓아라!"였는데...
아무튼 덕분에 마당 끝과 부엌 뒤 두 나무에서 20Kg의 매실을 거두었다. “매실 밭에 머우대가 좋구먼.”하는 드물댁 말에 얼른 뜯어서 들깨를 갈아 맛있게 볶고 생선을 구워 우리 과일농사 일꾼을 자처한 드물댁한테 점심 대접을 했다. 매실청까지 담그고 나니 자정이 가까웠다. 오밤중에 집을 앞뒤로 돌며 대청소를 하고 버릴 물건은 정자 앞에 모았다.
서울 가기 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작업을 다한 셈이다. 채마밭 채소들 지주 세우기, 배나무 솎고 소독하고, 매실 따서 매실청 담고, 마당 잔디 깎고... 기분 좋고 뿌듯하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 그리스도교 삼위일체 신학의 원전으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을 번역 출판하여 보스코가 가톨릭학술상까지 받았는데(상금은 내 차지), 보스코 박사는 삼위일체가 뭔지 알아듣나 모르겠다.
보스코의 주일복음 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152
대축일은 공소신자도 가급적 본당미사에 와서 영성체도 하면서 대축일답게 보내라는 주임신부님 당부도 있어 함양본당에 갔다. 우리처럼 수십 년 성당을 다니던 착한 양들은 신부님의 어떤 말씀도 잘 듣는다. 그런데 어제 아프리카 말라위에 다녀왔다는 큰아들 빵기의 인사와 신기한 부탁이 있었다.
제네바에 사는 친한 친구가 “인터넷 교회” 다니는데, 줌으로 예배를 보고 영화도 보고 토론도 한단다. 6월 하순에 『두 교황』을 감상하고 토론하는데 로마 교황에 대해서 (한 분은 즉위하셨을 때 보스코가 모셨고: 2004~2007, 프란체스코 교황님은 아빠도 좋아하시고 문대통령의 취임 특사로 가서 만났으니) 아빠 만큼 잘 알 사람이 없다면서 줌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한 말씀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주일 미사 안 가면 대죄’로 믿는 가톨릭에서는 팬데믹 때 성당 못가면 ‘TV 미사’라도 보라는 궁여지책을 내놓았는데, 말 그대로 '다 새롭게 뜯어고치는' 개신교(改新敎)답게 아예 ‘줌-예배’를 착안해 실시에 들어갔으니 세상사에 참 발 빠르다.
날씨가 몹시 가물어 언덕에 차만 지나가도 흙먼지가 난다. 논이야 관정으로라도 물을 퍼서라도 벼를 심는데, 그 물도 며칠이면 다 증발해버리니 농사는 역시 하느님 몫이다는 말이 맞다. 오후가 되니 날씨가 꾸무룩하고 눅눅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어디선가 비소식을 전해 올 것 같은 희망이 보인다. 세차게 한 줄기 내려 주었으면 좋겠다.
논에 물을 대고나서 두럭이 터져 방천날까 흙으로 메우는 한남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