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평신도 얼굴’(volto laicale) 찾기
살레시오 가족의 평신도 차원 ③
SALESIO 가족 [2023.07: 10~14쪽]
[잡지에서 읽기]
https://drive.google.com/file/d/1z8yxUtCsJO8SemlrNa6cVvnEpu8I1cjH/view
‘국민사도직’의 시대
필자가 교황청에 대한민국 대사로 파견되어 있던 중(2003~2007) 목격한 국제정치 사건 하나. 2004년 11월 4일 ‘영원한 도성 로마(Roma aeterna)’에 모인 유럽연합 창설 28개국 국가원수들이 이탈리아 대통령궁 퀴리날레(1870년까지 교황궁이었다!)에서 ‘유럽연합 헌법 서문’에 서명하여 유럽연합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동서냉전이 끝나면서 프랑스와 독일과 더불어 ‘유럽연합’을 추진하는데 앞장섰던 교황청은 그날의 역사적 행사에서 쓰라린 고배를 들고 있었다.
이 헌법 초안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교황청은 그 유럽연합의 ‘건국이념’으로 “유럽 문화는 그리스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문구가 헌법 서문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거의 전원이 신구교 크리스천이었던 신생 유럽연합 가입국 정상들은 “유럽의 문화적 종교적 인문적 유산들에 근거하여 발전된, 인간의 불가침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자유, 민주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들”을 건국이념으로 천명하는 데서 그쳤다. 현대 국가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인권과 자유, 민주와 평등 같은 보편적 가치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발전된 것’이겠지만, 제도교회로서의 그리스도교는 근현대 유럽의 탄생에 ‘기여한 바 없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는, 당시 언론 보도들이 떠오른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 간주되는 유럽 전부와 현대의 대다수 국가들이 삼권분립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국민복지를 최우선 정책으로 구현하고 있다. 국민연금, 빈민과 장애인 보호, 노동자 단결권과 주5일근무, 의료보험, 의무교육 등이 제도화되었다.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 교구나 수도회가 설립 운영하던 교육, 의료, 자선기관이 지금은 전국민이 세금을 모아 동포 전부를 돌보는 이 애덕 혹은 복지사업을 ‘국민사도직’으로 부를 만하다. 우리가 한국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과 복지시설도 머잖아 이 국민사도직에 편입되거나 편승해야 할지 모른다.
아르티메 총장의 2023년도 생활지표가 “돈 보스코 가족의 평신도 차원. 오늘날 인류 가족 안에서 누룩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이 가족의 성직자와 수도자들더러 ‘국민사도직’에 종사하는 우리 동역자들에게 “가까이 삶으로써 우리 형제자매들의 복음적 평신도성에 의해 풍요롭게 되라”(인사)는 제안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당신 교종직 최후 과업으로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가 인류사회의 구세적 운명을 지고 함께 걸어가자는 synodalitas(주교회의가 우리말 번역어도 못 내놓을만큼 성직자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다!)를 교회 안에 정착시키려는 의향과도 일치한다.
총장은 지표 첫머리에서 ”모든 나라에서 그 구성원의 대다수가 남녀 평신도인 돈 보스코의 가족을 위해서 평신도 차원을 발견하자”면서 “누룩은 ‘인류 가족의 빵’이 부풀어 올라 더 맛있게 되도록 밀가루 반죽이 ‘실체화’되도록 작용하는 능력”이라고 제창하였는데(서문), 돈보스코 가족의 ‘평신도 차원’이 뭐냐고 묻는다면 앙헬 신부도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위하여 일할 직접적인 의무는 평신도들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의 삶 전체와 ‘사회적 사랑’을 실천하는 그들의 정치 활동”(베네딕토 16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9항)을 인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을 이해하는데는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우리가 배운 서양사에 의하면, 현대 와서 전세계가 채택해가는 ‘민주정치’와 ‘복지정책’이 17세기부터 유럽 평신도들의 laicisation 운동에서 발원했다는 사실이다. 아르티메 총장은 저 운동에 “사회적 계급이나 혈통의 차이가 없는 백성 즉, ‘laos’의 한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의 ‘평신도 얼굴’(volto laicale)”을 찾는 운동이라는 멋진 정의를 내렸다(생활지표, 1). 역사적으로는 귀족과 대당되던 ‘평민’, 성직자와 구분되던 ‘평신도’를 가리켜 laici라는 단어가 함께 쓰였으므로 저 운동은 봉건제후로부터 벗어나던 ‘민주화’와 성직자들의 통솔로부터 벗어나던 ‘탈종교화’를 둘 다 포함한다.
저 운동을 살펴보면, 가령 로크(1632-1704)는 정부가 ‘사회계약’의 결과라며 공권력 행사는 법에 의해서만 정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계몽주의의 원조 볼테르(1694-1778)는 신앙의 맹목과 종교적 광신에 저항하여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고 종교적 관용을 외쳤다. 몽테스키(1689-1755)는 ‘삼권분리’를 내세워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루소(1712-1778)는 정치권력의 존재의의는 ‘공동선’에 있으며 사회적 평등은 ‘경제적 평등’에 있다면서 ‘의회민주주의’를 제창했다. 인류의 사고방식에 ‘코페르니쿠스 전환’을 일으켰다는 칸트(1724-1804)는 ‘인간과 그 존엄성’을 사회제도와 윤리도덕의 마지막 준거로 삼게 만들었다.
그런데 과거 300년간 유럽에서 ‘평신도의 탈 종교화 운동’을 주도하여 국민 전반의 사상적 계몽과 정치적 혁명을 거쳐 현대 민주국가의 복지정책을 초래한 저 위대한 평신도들의 저서치고 교황청이 ‘금서 목록(Index)’에 올리지 않은 책이 거의 없었다는 한탄할 역사다!
두 번째 전제는, 21세기 가톨릭교회가 인류에게 펼칠 ‘새로운 복음화’의 대본으로 확립했고, 살레시오 수도회가 최근 수차의 총회를 통해서 ‘돈보스코 가족의 미래 노선’으로 채택한 ‘사회복음’이라는 것이 언제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이다. 우리 어버이 돈보스코의 생전에 일어난 이탈리아 통일운동 결과로, 교황청이 천년 넘게(756-1870년) 중부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교황령(소위 ‘성베드로의 유산’)을 빼앗기고 그 동안 누리던 정치사회적 기득권을 모조리 상실한 다음에야 계몽주의 평신도들의 주장이 가톨릭 공문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 답이다.
하느님 왕국의 ‘누룩인 동시에 반죽’인 평신도
하느님 백성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모험’에 교황청이 지나치게 소심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옴으로써 가톨릭 교회는 계몽주의 이래로 지성인들을 잃었고, 공산주의의 등장으로 노동자들을 잃었고, 프로이트의 인간긍정을 무시하느라 젊은이들을 잃고서 최근 통계대로, 유럽 가톨릭신자의 3%, 한국 가톨릭 신자의 10%가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쇠락을 초래하고 말았다. 성직 및 수도 성소의 급감은 말할 것도 없다.
성당을 지배하는 분위기가 무미건조, 슬픔, 고독, ‘내 영혼만의 구원이라는 속물근성의 영성’으로 차면 제일 먼저 떨어져 나가는 것은 청소년들이고, 가톨릭교회의 최고수장인 프란치스코 교종마저 교종직 첫 문서 「복음의 기쁨」에서 젊은이들의 이런 ‘교회 체험’에 깊이 공감하였다. 성령이 일으킨 바람인 ‘사회복음’을 무시한 채 예절로 그치는 교회 생활은 “무덤의 심리학이자 박물관 미라”(83항)이며, “껍데기뿐인 영성과 사목으로 치장한 세속적인 교회, 하느님이 없는 종교적 겉치레 밑에 감춘 교회”(97항)라고, 그런 교회가 가르치는 신심 생활이란 “강생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호가 새겨져 있지 않은 영성”(95항)이라고 단언했다.
아르티메 총장이 “교회는 99% 이상(실제로는 99.99%)이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 비율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십시오. 평신도들은 하느님 왕국의 누룩인 동시에 반죽”(지표, 1)이라고 천명하고 있는데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라는 교서에서, 예나 지금이나 그 많은 평신도 중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구체생활과 학문세계에 비추어 해석하고 법률적 제도로 정착시켜가는 선각자들의 정치적 투신을 “성령께서 성경을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의 믿음 안에서 체험되고 세세대대로 전해지는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으로 만들어 주시는”(9항) 결실이라고 상찬한다. 제도교회를 향해서는 “성령의 활동을 신뢰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저마다 성경을 자신의 영성 생활의 규범으로 삼을 때에, 언제나 성령께서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영감’을 주십니다”(10항)라고 주지시킨다.
금년의 생활지표에서 아르티메 총장은 원대한 꿈을 드러낸다. “돈 보스코 사명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이들의 구원과 더불어 그 사회의 전환이다.” 예방교육 체계는 우리에게 맡겨진 젊은이들이 “교회 그리고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파멸시키는 악의 고리라는 악순환에 빠지는 일을 방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류의 “미래와 성장의 가장 큰 자원이 될 수 있게 하려는...세계적 규모의 청소년 복음화”를 겨냥한다.(지표 4)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돈보스코 가족의 ‘평신도 차원’이란, 청소년들을 ‘착한 그리스도인, 정직한 시민’으로 길러내고, 이 활동을 함께하는 동역자들을 국민사도직의 주역으로 독려하고, 회원들이 사회복음의 사도로 격상하는 일이다.
‘엄청난 교육적 공백’
2013년 교종직 최초의 해외 방문을 분단국 한국으로 택했던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거, 가슴에 달고 다니는 노랑 리봉 좀 떼세요. 교황답게 중립을 지키시라구요.”라고 시비하던 한국인 고위성직자에게 나온 “타인의 고통에 중립은 없습니다.”라던 답변을 우리는 기억한다.
영성적 타성에 젖어 있어서 ‘예방교육의 정치적 차원’이니 ‘돈보스코 가족의 평신도 차원’이니 회원과 동역자 간의 ‘synodalitas’라는 말이 우리 귀에 설다면, 선각자들의 “예언을 거부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무시하면서 자기 내면과 관심사에만 제한된 지평에 갇혀 지내는 것은 선으로 포장된 끔찍한 타락”(「복음의 기쁨」, 97항)이라는 교종의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아르티메 총장은, 살레시안들의 누룩으로 부풀려야 할 “반죽이 달라졌음에도,” 회원 모두가 ‘사회복음’에 젖는 “새로운 양성이 요구되는 한 배를 타고 있음에도”(지표 4) “애석하게도, 세계 많은 지역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단지 엄청난 교육적 공백일 뿐”(지표 10)이라고 실토한다. 그래서 그의 호소는 더 절실하다. “저는 평신도와 공유하는 사명에 대해 살레시오회 전체에 강력히 호소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4차 총회가 제안한 평신도와 함께 사명을 공유하는 모델(이 모델에 관해서는 다음 꼭지에서 다루겠다)은 돈 보스코의 모범에 상응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유일한 것이며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입니다.”(지표 4)
교종이 평신도들에게 보낸 사도적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도 교회가 채택한 ‘새로운 복음화의 정신’(33항)을 외면할 경우, 근대와 현대의 평신도 선각자들이 깨우쳤고 우리 동역자들이 전개할 ‘예수님의 평신도 얼굴’을 돈 보스코 가족이 묵살하게 될 ‘공백’이 암시되어 있다. “우리의 기도가 진정한 것인지 식별하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삶이 자비의 빛으로 얼마나 변모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자비는 ‘천국의 열쇠’”입니다.”(105항) 동료 회원이나 졸업생이나 동역자들의 “사회 참여를 피상적, 현세적, 세속적, 유물론적, 공산주의적, 대중 영합적인 것으로 보고 의혹을 제기하거나... 자신들이 수호하는 특정 윤리 문제를 내세워 사회 참여를 상대화시켜버리는” 주장에도 교종은 단호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명확하고 단호하며 열정적으로 무죄한 태아를 수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신성합니다.”(101항)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마태 25,11)라는 주님 말씀마따나, 19세기 이탈리아 산업혁명 시대에 도회지로 몰려온 청소년노동자들, 6.25 전쟁을 치른 후의 한반도 청소년들처럼, 제3세계에서 가난과 무학과 실업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은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므로 돈 보스코 가족은 늘 그들 곁에 머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말한 ‘사회적 자비’가 고갈될 즈음에는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