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요일


금요일. 잠이 안오는지 밤새 서재와 거실에서 서성이는 보스코 때문에 나도 밤을 뜬눈으로 샌 듯하다. 5시가 되니 희뿌연 미명에 잠마져 이부자리를 걷고 일어나자 보스코는 서재로 가버린다. 더는 도리가 없으니 나도 벌떡 일어나며 그에게 한마디, "그렇게 잠 안자면 치매가 빨리 온대요." 5.18일이 오면 보스코도 살아남은 자의 기억이 도져 며칠 밤을 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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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업복을 입고 몸에 모기 기피제를 잔뜩 뿌리고 토시를 끼고 장화 속에 바짓단을 밀어 넣는다. 낫을 들고 전동 가위도 챙겼다. 휴천재 마당 끝 축대를 벌초하러 나섰다. 보스코는 자기 허리가 낫고 나서 예전처럼 축대 아래쪽은 자기가 사다리를 놓고 잡초를 베고 나는 위쪽 덩쿨식물들을 뽑자고 한다. 그때까지 걔들이 기다려줄 리도 없고 덩쿨이 울타리를 넘어 꽃을 칭칭 감아버린 후에는 걷어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다행인지 축대의 큰돌이 밖으로 많이 밀려나와 그 위에 서서 작업을 할 수는 있었는데 혹시 축대가 무너지는 날에는 속수무책이다. 보스코는 축대가 무너지며 축대 위에서 일하던 내가 돌밑에 깔려 다칠까 봐 계속 내 주변을 빙빙 돈다. 그러나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어제 사서 잘드는 새 낫을 열심히 휘두른다. 


"감자꽃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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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보니 문섐이 맥문동이 자리를 잡고 잡초가 밀려나기 시작하면 잡초의 번식을 막아줘서 여러가지가 수월해진다던 말이 이해가 갔다. 정말 축대 위쪽으로 언제부턴가 맥문동이 번지기 시작했고 덩쿨식물들도 그 기세에 뿌리를 충분히 못 내려 쉽게 뽑혀왔다. 


김원장님이 소개한 전동가위의 위력이 대단하여 목수국도 30%는 쳐버렸고, 금목서도 시원하게 가지를 정리해주었다. 보스코는 내가 전동가위에 손가락이라도 잘릴까봐 안절부절. 시골에 내려와 처음으로 낫질을 할 때 손목을 칠까봐 걱정하던 때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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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읍내에 볼 일이 있어 나가는 길에 장날이니까 낙지를 사서 죽을 쑤어 달라고 자진해서 부탁한다. 좀처럼 없는 일이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생낙지를 사다 탁탁 다져서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포옥 끓여 한 그릇 내놓으니 맛나게 먹는다. 3년 전에도 폐암 수술 후 호천이 댁이 쑤어온 낙지 죽을 먹고 입맛을 되찾기 시작한 일이 생각난다. 식욕을 되찾으면서 눈에 띄게 몸이 회복 되었으니까.


토요일 아침 가야산 사는 가톨릭 농민회 정회장님이 병문안을 오겠다고 전화를 했다.보통은 집에서 대접을 하는데 미루네도 보고 싶다 하고, 보스코를 보살피느라 고생하는 내게 점심을 사주겠단다. 보스코가 좋아하는 산청각의 육회비빔밥을 먹기로 했다. 보스코는 양은 적지만 맛있게 비빔밥을 먹기에 이젠 회복기에 들어갔다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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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장님 작은딸은 지난 2년간 암투병으로 고생하다가 무사히 다 이겨내고 학교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 중이란다. 한의대를 다니니 자신의 병에서 얻은 경험에서, 자기에게 오는 환자들을 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밀 살리기 운동'으로 맺어진 우정으로 휴천재 장류와 짠지류는 언제나 정회장님네에서 조달해준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양파가 많이 누웠다. 할메들은 '양파는 누워서 큰다'고들 한다. 그런데 어떤 밭은 양파 꽃이 가득 피어있다 그건 모종을 잘못 사서 망한 밭이다. 나 어렸을 적 어느 해 육지에 양파 흉년이 들었다. 엄마는 양파장사를 해서 한 밑천 잡겠다고 막 떠나온 제주의 지인에게 엄청난 양의 양파를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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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채처럼 커다랗게 양파가 도착하여 쌓이던 날 엄마는 이미 갑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그 양파가 저렇게 꽃대를 자른 숫양파인걸 확인하고 그게 썩기 시작하여 폭싹 내려앉던 날 엄마의 희망도 그 밑에 폭싹 주저앉아 썩어버렸다. 엄마의 꿈과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일들 중 하나다. 다행히 아버지는 단 한마디도 엄마를 비난하거나 나무란 일은 없었다. 당신의 경제적 무능을 충분히 파악하시던 아빠는 당신 대신에 고생하던 엄마를 자랑스러워 했을 뿐이다


나도 조정옥 장로님의 맏딸답게 어렵게 모아진 몫돈을 빌려주거나 굴리다 무사한 경우가 하나도 없다. 다행히 보스코도 내가 돈 잃고 홧병에 정신줄까지 놓는 일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표정으로 가타부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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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주일복음 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154

오늘은 주일. 공소에서 다섯 명의 교우가 공소예절을 하고서 성령강림대축일을 넘겼다. 해거름에 마당 끝 잡초를 매고, 모아진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수십년 쓰다 내버리는 의자에 유로 폐기물 딱지를 붙여 차에 싣고 마을 앞에 내려다 놓고나니 주일 하루도 갔다. 휴천재 옆 논에 저녁나절에도 황새가 개구리를 잡아먹으러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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