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52일 목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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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노동절이어서 병원도 직원들도 모두 쉬는데, 남원의료원 접수실 앞에 늙수그레한 사람부터 허리가 기억자로 꺾인 할머니까지 수십명이 앉아서 접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직이 오늘 진료는 없어오.”라고 공지해도 서로 눈치만 보고 누가 더 오래 버티나, 일어서서 돌아갈 생각을 않는다.' “아니, 빨간 날도 아닌디 어째서 논다요?” 저렇게 버티면 누군가 치료해줄 사람이 나타나리라는 턱없는 기대라도 품고 있나 보다. 아무리 설명해도 안들으니 당직은 유리창 너머로 마주 보며 제 할 일만 하고 있다.


우리 이웃 남자 병실에는 84세 할베가 왼쪽 다리가 왕창 부러져 입원해 있다. 그런데 간병인이 핑크색 티를 입은 남자다(간병인들은 남녀 모두 핑크색 티셔츠를 제복처럼 입는다). 여자 간병인만 보다 남자를 보니까 그것도 신선하다. 중국에서 온 조선족이란다. 이 병원에도 남자 간호사들이 더러 있기는 한데, 뽀빠이 같은 팔뚝으로 링거 바늘을 찾을 때는 좀 으시시하지만 그건 선입견이고 눈에 익으니 든든한 막내아들보듯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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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부러진 그 아저씨는 우리 문하마을 유영감님처럼, 전동차를 탔다가 다리가 장애물에 걸린 걸 모르고 후진하느라 그대로 엎어져 다리가 망가졌단다. 본인이야 6주면 회복이 되지만 아버지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서 대처에서 달려오던 아들이 또 교통사고로 경추 몇 개를 다쳐 서너 달 입원해야 하는 처지라니... 2만평 과수원과 농장을 돌보던 농민들 부자(父子)가 사고났으니 올 과수 농사는 종쳤다며 장탄식이다. 보스코가 허리를 다쳐 휴천재 30 그루의 배농사를 고민하는 일이야 더는 말도 끄집어내지 말아야겠다.


그 할베가 내게 슬쩍 묻는다. “남자분과 나이 차이가 많아 보이는데 어떤 사이냐? 그리고 혹시 저 영감 외국인 아니냐?“ 묻는다. 왜 그리 생각하셨냐니까  '말씀을 한 마디도 안 하셔서 우리말을 모르는 외국인인 줄 알았다나?' 우리말을 한 마디도 모르는 불쌍한 외국 노인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젊은 여자라니... 어찌 보면 갖가지 요상한 추측을 해 볼만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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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 농부아저씨의 아내가 시동생 둘을 데리고 밤늦게 병문안을 왔다. 육회와 홍어 무침을 해 와서 나더러 먹으라는데 눈치를 보며 거절하느라 나만 미안했다. 두 시동생은 잘 구은 새우처럼 왼종일 해에 타서 빨갛다. 그들은 4형제인데 퇴직한 두 형제가 크게 공장을 하는 막내에게 가서 일을 하는데, 큰형이 사고를 당하자 맘씨 넉넉한 막내가 두 형에게 큰형이 나을 동안 가서 논농사를 도우라고 했단다. 농사를 모르던 두 아우에게 큰형은 그림으로 그려가며 모심기 단기 집중 교육을 시켰다. 병실이 시끌벅적 했지만 보기에는 좋았다.


아우님들에게 100마지기에 모심는 법을 가르치는 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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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면 집엘 가야 해서 어제는 휴천재에 들려 심야전기 온수도 올리고, 집안 정리와 청소를 했다. 5인실 병실에 한달 가까이 있다보니 내 집 휴천재가 대궐처럼 크게 느껴진다. 보스코의 부상에 맞추어 이층 오르내리는 계단에 손잡이 난간도 해야 하고, 언덕진 길이며 평상시에는 생각 없이 다니던 길도 아픈 사람 본위로 생각하니 사방에 복병이 숨어 있다.

 

오늘은 병원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보험회사와 경찰서 등지에 제출할 서류도 준비하고, 집에 철해둘 검사기록도 준비해달라고 신청해 놓았다. 그동안 CT, MR, 피검사 등 모든 기록을 모아 두었는데 그게 언제 어디에 필요할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허리뼈가 잘 붙었는지 어떤지 엑스레이를 찍었으니 더는 할 일이 없다.


천주 엄마 김옥련(블란디나)씨가 모친을 뵈러 익산에 왔다가 어떻게 우리 얘기를 듣고 남원까지 내려와서 문병을 하고 갔다. 서울 살면서 한일병원에 다닐 적마다 우리 주치의처럼 우리 부부를 돌봐준 벗이다. 


내일 집에 가면 우선 2층으로 올라가는 핸드레일을 해서 보스코가 안전하게 뻣뻣한 허리로 붙잡고 오르내리도록 이사야에게 부탁을 했다. 좀 어지럽고 머리가 쭈삤거리며 뜨겁다고 신경외과 선생님께 말하니. “그 나이에 교통사고가 났으니 어지럽고 뇌의 크기도 줄어들고 목도 아프고... 다 정상이지요.” 그렇게 하나씩 망가져가야 늙으면 죽고 그 자리에 새 생명이 돋아나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 가르침이다.


겨울에 낙엽이 떨어져 썩어야 봄에 새잎이 돋아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이치를 요즘 풍요롭게 보고 배우는 중이다. “나만은 아니다. 나는 특별하오,”라는 억지는 안 통한다. 하느님이 갖가지 불평등은 허락하시지만 죽음만은 만민에게 동등하게 배려해 두신 것 감사드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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