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20일 화요일.


어제 월요일 밤. 살짝 열려진 침실 커튼 사이로 번쩍 한 줄기 빛이 스친다. 꼬리 잡기라도 하듯 뒤이어 '우르릉 쾅!' 먼 데서 천둥이 소리를 쏟아낸다. 뒤이어 쏴아~‘ 비 지나가는 소리. 지리산 저 높고 넓은 산을 덮은 꽃나무들마다 꽃송이들의 봄잠을 깨우느라 수선스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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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일어나보니 휴천재 매화나무들이 끝가지부터 송이를 피워 올리고 있다. 송이마다 물방울 다이야를 귀고리로 단 모습은 무척이나 경쾌한 행렬이다. 빗물 다이아가 얼마나 값나가는지조차 모르는 무식한 바람이 조심성 없이 지나가며 함부로 남의 귀걸이를 털어내기도 한다


휴천재 맞은편 휴천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너울로 와불산 자태를 벗겼다 가렸다 해서 눈 둘 데를 모르겠다. 능선으로 각선미를 또렷이 드러내는 소나무들은 나란히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발레리나들의 뽐내는 자태들이고.


나는 어려서부터 늘 맹랑한 아이여서 어른들이 혀를 내둘렀다. 예컨대 대학 들어가서도 엄마가 내 등록금 마련에 애태우는 모습을 보고선 외갓집 어른(윤치영)을 찾아가 할아버지, 저 대학입학 등록금 좀 대주세요. 담에 못 갚아도 착하게는 살게요.” 라는 협박식 구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엊그제 나같은 소년시절을 보낸 노인의 모험담을 들었다지난 주일 미사에 그분이 당신 계모님의 기일을 맞아 연미사를 청한 데서 얘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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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교직에 계셨던 터라 그 일대 선생님들한테서 부조가 꽤 많이 들어왔어요. 병석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는 아내의 장례 부의금을 처남이 챙겨갔다는 얘기를 듣고 혼자서 끌탕을 하고 계셨죠. 내가 한나절 걸어 외삼촌댁을 찾아갔어요. '아버지가 부줏돈 찾아오라셨어요.' '넌 어려서 못 준다.'  '빨리 안 주면 외삼촌 학교 조회 시간에 연단에 올라가 "울 삼촌이 울 엄마 부줏돈 떼먹었다!" 외칠 꺼예요.' 외삼촌도 학교 선생님이셔서 찔끔했던지 봉투 중에서 반만 골라 던져주는 거예요. '그 돈 다 안 주면 "울엄마 부줏돈 반 떼 먹었다!" 할 꺼에요.' '더런 자슥! 그래 다 가져가라!' 아무튼 부주한 사람 명단(봉투)까지 챙겨왔죠." 


"그 돈 가져다 드리니, 돈이 얼마나 좋은 건지 몰라도, 병상에 누워 계시던 울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앉으시더라구요. 돈의 위력을 그때 알았죠." 돈의 위력을 일찍 알아챈 그분은 일찌감치 유통업계에 발을 들여 경제인으로 늙어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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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유쾌한 만담은 좀처럼 웃을 게 없는 은빛나래단 80대 노인들이 큰 소리로 웃게 해준다. 당신 옆에 앉은 아내에게 나를 가리켜 보이며 "나 담에 태어나면 저렇게 남편에게 기막히게 잘하는 여자와 꼭 한번 살아보고 싶소." 그 아내는 '뭔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야?' 하는 표정이고, 옆에서 들은 보스코는 '그래 꼭 한번 살아보시라구요! 두 번 살라면 도망갈텐데.' 라는 표정이지만 우리 모임의 이런 웃음바탕은 늘 그분이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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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읍내 나간 길에 '운림원' 영숙씨를 찾아갔다. 남편 여의고 나서 슬플 겨를도 없이 설날에 딸네 손녀들이 우르르 와서 혼을 쏙 빼놓고 가더라나. 그렇게 귀여운 손자손녀들 등쌀에 애도의 기간이 잠깐 끊겼다가도 다시 혼자 남자, 어스름 저녁이면 남편이 "여보, 나 왔어!" 하며 들어설 것 같아 자꾸만 문께를 돌아본단다


지리산 집에서 보스코랑 긴 세월 둘이만 살다보니만약 저 남자가 없다면 이 적막한 공간에 단 하루도 못 버티겠구나는  예감이 절절하다여자가 남자보다 평균수명이 훨씬 길다지만 남편 없이 보내는 나머지 여생은 아무래도 '미망인(未亡人: 죽긴 죽었는데 아직 덜 죽은 사람)'의 짜투리 삶일까?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4452 (보스코가 집필한 '죽음')

보스코는 강단에 있을 때 '죽음'이라는 주제를 자주 다루었다. 그70년대에 번역 소개하여 한국에 호스피스운동이 일어나게 만든, 퀴블러로스(『인간의 죽음(Death and Dying)』[1979. 분도출판사]의 저자)가 "인생에서 제일 슬픈 일은 너무 빨리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고, 제일 불행한 것은 너무 늦게 사랑을 깨닫는 일"이라 했다는데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나면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체득하느라 그리도 오래오래 그리움을 앓나 보다.


그러나 우이동 시인들의 월간 시집 우리 』지난 호를 읽다가 거기서 제일 짧은 시가 삶의 소소한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은혜였던가를 절감케 하는 여운을 남겼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시간들이면.


말복 날 집을 나간 똥개 밥그릇

깨진 개밥그릇에 빗물이 고여

둥근달이 둥실둥실 떠오르고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이화인. ”은총전문)


오늘도 종일 비가 내려 부엌 뒷마루에 놓인 고양이 밥그릇이 빗물로 차고 넘친다안타깝게 오늘 점심에는 라면 삶아 먹느라 길냥이들한테 줄 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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