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13일 화요일. 맑음


월요일 아침, 작은아들이 설 휴가를 하루 앞당겨 떠나고 나니 우리도 하루 앞당겨 일상으로 돌아왔다. 보스코가 어제부터 간혹 몸에 한기가 든다며 뜨끈뜨끈 온돌방인 긴 방에서 잠들기도 한다. 석달 전 내출혈 후 워낙 잠이 줄어 내가 애태우던 터라 어디서든 잠만 들면 삼한 아이 겨우 잠재워 놓았다는 심정으로 난 발소리를 죽여 조심조심 움직인다. 오늘은 아침 7시까지 잘 자고 일어나서는 이젠 정신이 돌아온 듯하단다. 


휴천재 은목서 옆의 동백도 꽃망울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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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아침기도와 티벳요가를 하다가 자기는 요즘 ',,'을 발음하면 소리가 새는지, 혀가 말리는 듯하고 자판기를 두드려도 오타가 너무 많이 나온다고 걱정이다. “그럼 MR1 찍어볼까, 혹시 뇌경색이 지나갔나 보게?”라니 그럴 필요는 없어.” 라는 대답. 아무튼 아내와의 대화에서는 엄마, ~ 해줘라는 식의 건강염려증이 자주 발생한다


나이 80이 한참 넘어 아직도 하루 10시간 가량 아우구스티누스의 라틴어 원전과 씨름할 두뇌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을 테지 하며 나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다. 빵고신부도 이번 '본가방문'을 끝내고 가면서 "아빠는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고, 아빠 하던 일을 죽기 전에 못 끝낼까가 걱정되시나 봐요."라는 평을 내렸다. 우리 엄마는 늘 일에 몰리는 내게 딱하다는 듯 "일 다하고 죽은 귀신 없다." 하셨다.


텃밭 자두나무 꽃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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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혼자 사는 친구의 감기가 심하다. 너무 안타까워 죽이라도 끓여다 줄까 물으니 딱 잘라 거절한다. '왜 그럴까?' 갸우뚱하다가 심하게 아프면 만사가 다 귀찮겠지 싶었다. 그래도 감기약이라도 먹으려면 뭔가 먹어야 할 것 같아 낙지 죽을 쒀다 주었다. 몇 시간 뒤 그릇을 갖고 올라와서 '사모님, 선의를 거절해 미안해요.' 한다. 남의 선의를 받아드리는데도 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내 선의가 때로는 상대방을 귀찮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물댁이 대구 가서 딸을 시켜 문자를 보냈다. 나한테 아무 말 않고 아들 따라 대구에 가서 병원도 가고 딸네도 있어야 하는데, 내가 자기를 찾아다닐까 걱정돼서였단.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동네, 나를 찾아다니고 걱정하는 친구가 있는 소중한 사람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한 그미가 너무 사랑스럽다. 그미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나도 기분이 좋다.


화분 여섯의 긴기아난이 다 꽃을 피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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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 꽃향기가 가득하다. 긴기아난은 수수한 모습에 순박한 흰 꽃을 피워올리는데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향기를 뿜기 시작한다. 그러다 해가 중천을 지날 무렵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거실을 향기로 가득 채운다. 가느다란 가지엔 꽃구경 오는 작은 손님들, 개미나 벌나비나 파리를 위해 방울방을 달큼한 꿀도 준비한다. 벌레가 없는 겨울의 실내에서 꽃은 손님을 기다리다 꿀이 열린 가지와 함께 진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지만, 휴천재 마루에 들어와 겨우내 꽃망울을 준비해서 한 주일 피워 올리는 이 향기를 풍기고 맡기 위해 나도 꽃도 일년을 서로서로 돌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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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집안 전부를 밀걸레로 닦아내는 게 나의 아침 일과이지만 햇볕이 방안 가득가득 들어오는 시각이면 가구 밑이나 방 구석의 먼지마저 눈에 환하게 보인다. 서재 가득히 들어온 햇살에 오래 전 이콘화가 최연희 화백이 기증해준 "성모자상"(2004년작) 그림에 곰팡이가 얼룩덜룩하다. 화가에게 전화해서 설 인사를 나누고 곰팡이 제거를 문의했더니, 계란 노른자에 물감을 개서 그리는 작품이므로 물걸레로 문지르면 싹 지워진다며 아주 부드러운 솔로 가볍게 털란다.물어 보길 잘했다. 마침 붓솔이 있어 살살 털었더니 정말 깔끔하게 곰팡이가 떨어져나간다. 20년만의 그림 청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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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풀려 둘이서 운서로 산보를 갔다. 미자씨네를 갔는데 주인이 없어 서운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설 여행에서 돌아오는 그 부부를 만났다, 캠핑카 형태로 개조한 트럭을 타고. 부부가 마음 맞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여행도 함께 다니는 모습은 언제, 누가 봐도 흐뭇하다.


집으로 올라오다 한남댁을 만나 동네 얘기를 하고 있는데 운서의 비비안나가 들어선다. 그미의 세 자녀는 우리 문정공소의 '세 귀요미'였다. 다 자랐을 세 자녀의 근황을 물으니 다들 하고 싶은 일에 열심히 살고 있단다. 큰딸 지나는 광고 모델이 됐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이 됐다. 애들의 미래는 우리가 그리는 그림이나 스케줄을 까마득히 뛰어넘는다


빵고 어렸을 적 로마의 어린이집 단짝친구 만리오의 동생 플라비오가 멋진 청년으로 자라서 이탈리아 패션잡지를 채우는 모델 사진을 보고서 놀란 것도 10여년 전 일이다. 어렸을 적부터 본 아이들이 미남미녀로 화사해진 청춘을 볼 적마다 워즈워드의 첫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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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나와 플라비오(옆의 동료 여인은 그의 아내가 된 마리아)의 멋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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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칠순 팔순의 우리 부부에게 그런 청춘이 다시는 안 돌려진다 할지라도 함께 해로한 50년 세월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에 깊이 찬탄한다.


주한 교황대사였던 스웨렙 대주교님이 모로코 주재 교황대사로 부임하여 성탄 신년 카드를 보내왔다. 그간에 모친 도리스(90세)께서 돌아가신 소식과 부고장도 보내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개인비서를 지냈고, 교황님의 '바티칸 재정 투명화'라는 역사적 개혁사업을 5년간 도맡아 실무를 추진한 뒤 주한대사로 부임했던 인물이다. 6년전 한국에 부임하자마자 한 주간을 우리 부부가 대주교님과 제주에서 함께 보낸 기억이 생생하다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315899

'제주 4.3'을 추모하는 '평화공원'을 방문하고, 그 무렵 제주에 입항한 남예멘 난민들의 사정을 듣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위로금을 받아들고 난민촌을 방문한 사실로만 보아도 그분의 성향을 엿볼 수 있었다. 모친에 대한 극진한 효심이 기억나고,  이탈리아 성직자들이 수도자여도 죽어서는 수도회 묘지보다는 반드시 고향 가족묘에 돌아가서 묻히는 향토애와 가족애는 인상적이다(참고: 수에렙 대사님은 몰타 섬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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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렙 대사님 모친의  부고장과 한국 재임시 서울집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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