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1일 목요일. 가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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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먹은 음식이 안 좋았던지 배탈이 났다. 보스코는 뭐라도 먹으라고 채근하지만 속이 나쁜데도 계속 먹어대는 멍청한 짐승은 인간밖에 없다대답하고, 위장이 자주 탈나는 내 경험을 살려, 배 아프면 우선 며칠 굶고 물이나 조금씩 먹으며 속을 가라앉혔다. 엽렵한 체칠리아는 속 탈난 데는 매실이 직빵이라며 따뜻한 물에 매실액을 타서 마시란다


그래 어제 아침엔 매실차 반 잔을, 점심엔 한 잔을 마셨다. 집에만 있으면 자꾸 눕고 싶어져 보스코더러 천천히라도 산보를 하자고 했다. 휴천강 강변길을 걸으며 물에서 노닐거나 낚시하는 새들도 보고 싶었다. 바위 위에 앉아 하염 없이 물속을 내려다보는 백로는 그 긴 시간 동안 물고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지 두 눈은 물결에 흔들리고 있다. '배고프겠다, 기다리기만 한다면.' 이웃에는 해오라기가 아예 먼 산을 보며 명상 중이다. 철학하는 새들인가 보다. 풀숲에서는 풀씨를 찾아 헤매던 멧새들이 우리의 발걸음에 지레 겁먹고 포르르 떼 지어 날아오른다. 얼음이 녹아내리고 오리들이 쌍을 이뤄 한가로이 노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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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보스코의 영명축일이어서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전화로 문자로 축하해 주었다. 이윤호신부님, 스위스에서 소피아님, 미국에서 김요한선생님, 작은아들 빵고신부, 김체칠리아수녀님, 김마리아수녀님, 이봉하수사님, 국수녀님, 오상선신부님, 노유자수녀님, 대자 김루아님, 양체칠리아님, 방스텔라님, 이엘리, 오드리, 미루, 보스코 '누이' 글라라수녀님, 이아녜스님, 진로사님, 박병준신부님, 김옥련님, 고미카엘선생님, 최연희님, 우리 대모 가브리엘수녀님, 최엘리사벳수녀님, 도메니카님, 윤사무엘님, 김체칠리아님, 하모니카님... 해마다 축하를 보내주시는 분들이지만 올해는 보스코의 건강을 염려하는 그분들 기도에 감사드리는 뜻에서 이름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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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으며 로사리오를 염하면서 저분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보스코가 정말 많은 이들에게서 사랑 받고 있음을 절감하는 하루다. 산 이들을 위해서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든 사랑스러운 이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가며 묵주알 한 알씩 돌리는 우리의 고유한 로사리오는 각 단에서 묵상하는 신비와 더불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우리 둘을 참 행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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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길 끝에 물가에 하얗고 편편한 돌을 찾아 보스코와 나란히 앉았다. 남호리 우리 밭 위로는 법화산 능선으로 잎사귀를 떨군 나무가 한가롭게 손을 뻗어 흐르는 흰구름을 쓰다듬는다. 파아란 하늘이어서 흰 구름이 유난히 곱다. "~ 아름답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둘이서 함께 보니 저리 아름답지 혼자라면 저 풍경들마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시구 따라 모조리 우리를 눈물겹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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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보스코를 볼 때마다 "선상님!"이라고 부르며 지고가던 지게를 세워 예를 차리던 옥구아저씨 무덤이 있다. 그 무덤을 향해 '주모경' 한 번. 동네 초입에서 올려다보는 우리동네 아래숯꾸지는 아담하다. 동네 집들이 대부분 마을 진산 와불산을 똑바로 보는 정남향으로 서 있는데 우리집 휴천재만 산청 왕산을 향해 동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고 앉았다. 집을 앉히고 지은 진이아빠가 큰 산에 대한 예의를 차린 것이다.


21일.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너무 말짱하다. 소담정 도메니카씨가 내 걱정에 전화를 했다가 내 상태를 듣고는 그렇게 건강하게 낳아주신 어머님께 감사드리세요.’ 당부한다. 80세에 양로원에 들어가셔서 100세를 맞아 스스로 단식으로 만 한 세기 삶을 마감하신 엄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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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고신부 생일이어서  저희에게 이토록 사랑스런 생명을 배급해주신하느님께 감사드리고 ‘500억 광년 걸리는 우주 저편으로부터 우리 두 사람을 부모로 택해서 여행온’ 작은아들에게 전화로 고마움을 전했다. 빵고가 얼마나 곰살스럽게 자라던지 "아가야, 너처럼 사랑스러운 남자를 만난다면 이 엄마는 당장 또 한번의 가출을 할 테다"라고 속삭이곤 하던 때가 벌써 45년 전이라니!


엊그제 남해 형부한테서 받은 굴을 쪄서 까놓았었다. 무와 콩나물을 넣고 굴밥을 해서 달래장에 비벼먹고 싶어,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우산을 쓰고 어람댁 밭두렁으로 가서 나물을 캤다. 동네 주치의 도메니카씨를 불러 시레기국에 달래장에 굴밥을 맛나게 비벼 먹었다. 그미도 어린 시절 겨울 별식으로는 콩나물밥이 제일이라고 추억의 맛이라며 반긴다. 보스코도 11월 큰 탈 후 입맛이 돌아오는지 모처럼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낼 모레 글피면 입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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