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월 30일 목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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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뒤꼍 3층 층계참에 매달린 풍경을 새벽같이 두드리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집 나갔다 돌아왔으면 맛 좀 봐야지. 뭐든 당신 뜻대로 된다는 생각일랑 버려!’라는 메시지가 울려온다. 바람은 거칠고 몸은 지치고 눈은 감기고...


그런데 수요일 새벽같이 나를 불러내는 사람은 이 동네에 드물댁 한 사람뿐. "어째, 이제 오요? 동네 사람들 다들 무 뺐는데[= 뽑았는데] 날씨는 추워 지고 애가 터져 죽는 줄 알았고마왔음 어여 아침 먹고 밭에 나오지 않고 해가 중천인데 뭐허요?"  


희정씨랑 목요일 오늘 김장을 하자고 약속을 해둔 터라 나 역시 마음이 급했다. 배추는 김장할 만큼 40여 포기 뽑고, 무도 배추에 속넣을 만큼 스무 개만 우선 뽑겠다고 했다. 그런데 날씨가 엄청 추워지고 무는 얼면 안 된다며 나머지 무도 다 뽑아 다 옮겨야 한다고 드물댁이 성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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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장출혈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이 덜 되어 무 나르는데 그의 도움을 받기는 글렀고 네 고랑 되는 저 무를 캐내 언덕을 끌고 올라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주저앉고 싶다. 드물댁이 수레를 밀어 준다지만 그미도 무릎수술을 한 터에 밀기보단 매달리는 지경이어서 난감했다. 하지만 어쩌냐, ‘이 없으면 잇몸이고 그도 없으면 틀니지?’


친구에게 갖다 준 무가 속에 멍든 것처럼 퍼런 색이 들었다 해서 썩 내키지도 않았지만 '내가 키운 것이니 내가 책임진다'는 심경으로 죽을 힘 다해 끌어다 감동 창고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엊저녁 보스코가 채칼로 무를 썰 때 보니까 병도 없고 단단하고 다디달아 '휴천재 무 모함받았다'고 서운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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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레 올 농사 엄청 잘됐다고 생각했던 배추가 겉은 멀쩡한데 속병이 들었고, 병 없는 것도 여나믄 포기 빼고는 속이 안 찼다. 나를 위로하는 말인지 드물댁은 "동네 딴 집도 올 배춘 속이 안 찼다더라." 일러준다. 그나마 다행인 게 우리가 김장하기엔 충분하고, 맛이 달고 고소하니 그만하면 됐다!


어제 오후 5시부터 배추절이를 시작하는데 7시가 넘어서야 끝났고 비까지 후둑후둑 내렸다. '그래, 김장하는 날은 추워야 김장이 제맛이지.' 그래도 드물댁이 무와 알타리를 다듬어 주고 씻어 주었다. 엊저녁 나절 미루네 세 식구가 보스코 병문안 겸 무를 뽑으러 왔다. 미루를 본 보스코는 얼굴이 화안해진다. 지리산에 이리도 귀한 가족이 가까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밤 김장 시작! 보스코가 채는 썰어줘서 그나마 일을 덜었다. 멸치 다시 내서 찹쌀 죽 쑤고, 무채 고추 가루에 버무려  놓고, 알타리 김치꺼리 다듬고, 채소들 씻어서 썰고, 김장 통들 씻어 말리고 나니 새벽 한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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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제를 타 먹고, 나더러 허리 풀라고 그가 켜 놓은 전기방석을 깔고 누우면서 "내년부터는 더는 못하겠어요, 댓 포기면 되는 우리 김장을 남들 생각해서 배추농사에 김장에 택배발송에 이 고생이니..." 라고 푸념하자 보스코의 즉답, "그래, 이번에 김치 보내며 올해로 마지막이라고 얘기해 보시지. 다만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말끝이 묘한 뉴앙스를 풍긴다


오늘은 11월 마지막 날 목요일. 아침부터 찬바람이 몰아친다. 날씨는 맑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배추를 한번 뒤집었고 9시쯤 절인 배추 씻으려는 참에 드물댁이 올라왔다. 10시에는 읍에서 희정씨가 김장해주러 왔다. 배춧속 넣을 때는 아래층 진이엄마도 합류했다. 돕는 일손들이 있으니 엄살은 말자. 배추가 별로 맘에 안 들었지만 소를 넣고 보니 달고 맛있다. 배추 탓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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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정리의 여왕' 희정씨가 김장하며 썼던 모든 그릇을 깨끗하게 닦고 비닐은 정리하여 정자에 걸었다. 그동안 바람이 얼마나 거칠었는지 열흘 전 정자에 걸어 말리던 무청이 다 날아가 버렸다. 보스코는 찬바람 속에 내 염려를 개무시하고 루콜라와 상추에 미니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주었다.저러면 겨울에도 신선한 샐러드를 먹을 수 있으니 고맙다.


산으로 돌아올 적마다 반갑게 맞아주는 이웃이 있고, 김장을 마쳤으니 겨울 채비 끝났고, 먼 산은 하얗게 우리 맘에도 눈 이불 덮어주며 다독이니 마고할메 치맛자락 떠나지 말고 마냥 여기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