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6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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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 보스코를 보훈병원에서 퇴원시키러 떠나기 전. 며칠 눈에도 안 띄던 이것저것이 보인다. 정리되지 않은 방이며 빨래, 방바닥을 구르는 먼지까지 내게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일러준다. 남편의 병원 입원으로 다 안중에서 사라졌다는 말일까? 일상으로 돌아갈 차례니 집안 정리, 청소, 빨래 순으로 아침 일을 끝내고 병원으로 갔다. 보스코의 주치의가 다음 주에는 학회 참석 차 해외 출장을 간다니 금주 내내 전적으로 그에게 보살핌을 받은 것도 큰 행운이었음을 알겠다. 


보스코는 자기가 짐 다 챙겼으니 어서 집에 가잔다. 남자가 한 일은 별로 믿을 수 없어 떠나기 전 여자가 한번은 뒷자리를 둘러 봐야 한다. 환자 서랍엔 그의 지갑과 일상 용품이 그대로 들어있고 냉장고에도 뭔가 많다. 그가 신경 쓴 건 자기 노트북 챙기는 일 뿐이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우정치과에 들러, 보스코의 두번째 임플란트를 준비하는 윗니 자리에 임시 치아를 붙여 넣었다. 수십년간 한쪽으로만 음식을 씹다 보니 사랑니가 적출되고 반대편 턱으로 음식을 씹자니 자꾸만 잇몸을 깨문다는 호소 때문이다. 손이 참 많이 가는 남자. 


하기야 치과의 주차 관리인도 우리를 노인으로 대접하고, 장애인 자리에 주차하도록 배려해준다. 차에서 내린 꺼벙한 노인이 감기라도 걸릴까 '바람이 차니 얼른 건물 안으로 먼저 들어가 계세요.' 한다. 닷새 입원과 금식으로 4-5킬로 빠진 그의 모습은 내가 보아도 창백한 노인 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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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보스코는 너무 기력이 없어 보여 저녁으로 누룽지를 끓여 주었다. 잠들려는데 잠자기도 힘든가 보다. 이명도 들리는 것 같고 옆에서 들으니 혀도 말려 들어가듯이 혀짧은 소리를 내기에 귀와 혀의 압통점에 티침을 놓아 주었다. 이튿날 침엔 그 증상이 사라졌단다.


토요일 낮엔 한신 후배 전규자 목사가 보스코 소식을 듣고 두손치유를 해주러 멀리김포에서 왔다. 힘든 몸으로 움직이면서도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는 그 손길에는 바위에도 싹이 나겠다. 두 시간 훨씬 넘도록 혈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풀어주자 새하얗던 보스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딱 일주일만의 일이다


내 친구 한국염 목사도 병문안을 와 주었고, 꼬맹이 엄엘리도 그 바쁜 중에 어려운 걸음을 하여 위문을 왔다. 주변에 그 많은 이들의 사랑과 관심이 우리 삶을 따사로이 감싸준다국수녀님은 '대사님이 하시던 일 끝나야 주님이 거두어 가실 것 같으니 부디 천천히 일을 끝내세요.'라는 문안 인사를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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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장님은 그와 반대로, '대사님은 할 일 안 끝나서 죽을 수 없다시지만 우리 아버지는 할 일 아무것 없이도 90을 훌쩍 넘기고 편히 살고 계시니 어떻게 사는 편이 잘사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아무튼 건강 잘 챙기시라'는 조언을 내린다. 내가 보기에도 보스코는 받은 게 많아 인생에 빚을 많이 지었음에 틀림 없다. 그걸 다 받아 내실 때까지 살라고 하실지 그만하면 됐다 하실지 그분만 아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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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주일복음 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062

오늘은 연중 마지막 그리스도왕 대축일. 대림절이 오고 낼모레는 지리산 내려가야 하니까 오늘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두자면서 다락에서 장식물 상자들을 들어내리던 보스코가 어지럽다고 눕는다. 그래서 9시 우이성당 미사를 가겠다던 계획을 접고 유투브 미사를 보았다. 코로나 때도 꼭 미사를 다녔는데 건강이 꺾이면 어쩔 수 없구나 싶어 서글프다.


보스코가 날라준 트리와 상자로 나는 오후 내내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몄다. 결혼하던 해(1973), 광주신학대학교 뜰에서 베어낸 메타세코이아 가지를 욕심껏 실어다가 사글세방 벽에다 못으로 쾅쾅 박아서 집주인 아주머니의 싫은 소리를 들어가며 첫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었다. 그 뒤로 몇 해를 빼곤 해마다 집안에 트리를 만들어 세웠다. '삶은 축제고 축제는 즐겨야 한다.'는 게 보스코와 나의 지론이다. 어렸을 적엔 꽃등이 깜빡이는 걸 보고 그리도 좋아 하던 두 아들을 거쳐 이젠 두 손주가 스위스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든다


트리 아래 '나폴리 구유'를 꾸미며 "내년에도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으려나?" 스스로 묻는다. 그런 물음을 던질만한 나이인 것이, 해마다 망가져 가는 게 트리나 꽃등만 아니고 우리 인간이기도 하다. 80이 넘자 보스코에게서도 여기저기 기계 망가지는 소리가 또박또박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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