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6일 목요일. 겨울비


나무가 옷을 다 벗으면 그동안 자기 몸에 걸치고 있었거나 감고 올라온 모든 것이 고스란히 드러난다휴천재 서재 동쪽 창에서 내다보이는 독일가문비나무엔 능소화가 염치없이 꼭대기까지 칭칭 감고 올라가 있어 마치 너덜너덜한 능소화를 속옷으로 걸치고 사는 듯한 초라한 모습을 보인다. 의젓한 상록수가 그런 자태 남보이기 부끄럽다는 듯, 10여미터 크기의 나무 전체를 왼쪽으로 삐뚜룸 기울이고 있다. 능소화 꽃과 잎이 그 점잖은 나무를 온통 뒤덮었어도 꽃구경에 정신이 팔려 저 능소화를 견뎌내는 가문비나무 처지는 생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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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도에서 살 적. 오빠는 중3, 나는 중1, 밑으로 호천이 순행이 호연이가 연달아 있었다. 지금 쯤 되는 입동 무렵이면 엄마는 광에 장작을 가득 들이셨다. 겨울에 춥지 않으려면 저 무지무지 많은 장작을 다 때야 했다순행이와 내가 같이 쓰던 건너 방은 앉은뱅이 책상 두 개로도 자매가 이불 펴고 눕기에 비좁았는데, 늦가을이면 엄마는 그 방 윗목에 한 해 먹을 쌀 열두 가마를 쌓아 올리셨다. ‘저거면 새끼들 일년 배곯지 않겠지.’하시는 뿌듯한 눈으로 가끔 우리 방을 열고 쌀가마니를 바라보셨다 눈길은 우리 두 딸보다 쌀가마에 오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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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왜 요새처럼 벼로 쌓아두었다 때 맞춰 도정해서 먹지 않았을까?’ 우리 일곱 식구가 한 달에 쌀 한 가마 씩 먹어댄 셈. 지금 늙은이 우리 두 식구가 10킬로 한 부대면 여러 달 걸려 비우는 것과는 거리가 많다둥글반 밥상에 둘러앉은 오라비들은 서너 공기씩 밥을 먹었으니 누에가 뽕닢 먹는 소리가 상에서 났다. 아버지는 우리 다섯이 먹어 대는 모습이 무시무시하다 하셨고 엄마는 마냥 흡족하신 얼굴이었다. 자식들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처럼 부모를 행복하게 만드는 소리가 없다는데...


부모님 약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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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나는 여름이면 이불 속으로 스물거리던 쌀 벌레와 방바닥 가득 기어다니는 바구미가 지겹다고 푸념했다. 우리 엄마에게 부의 상징은 패물이나 좋은 옷이 아니었고 쌀과 장작이었다. 서울에서 잘사는 이모들에 견줘 기미와 검은깨로 얼룩지고 밭농사로 까맣게 탄 엄마는 왜 그리 늙어 보였는던지 그 당시 마흔넷의 엄마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늙기 전에 죽어야지.’ 하는 철부지 생각마저 했다.


여름이면 학교 농사 실습지에 당신이 손수 농사지은 지어 거두신 과일 참외, 토마토, 옥수수, 감자가 날마다 소쿠리에 가득 담겨 마루에 놓였으니 무럭무럭 자라는 다섯 자녀를 먹이시던 노력이 얼굴에 꽃으로 주름으로 피어난 것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엄마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저 전나무를 칭칭 감은 능소화처럼 우리 다섯이 다 빨아들이고엄마에게는 쭉정이만 남겼던 모습을 이제야 추억 속에 절감하다니... “엄마그저 미안해요.” 한 마디 뿐 드릴 말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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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 부모님이 우리에게 가문비나무였고 우리는 속 없이 그저 먹어 대며 크느라 그분들이 휘어져 가는 허리는 못 보았다엄마는 처음부터 저러셨거니늘 그렇게 늙어 계셨거니 했다


내가 이 나이에도 휴천재 텃밭 일을 부지런히 가꾸는 것도 엄마의 억척 유전자다. 어제 저녁 늦도록  보스코와 함께 한 가을걷이로 텃밭도 금년의 휴면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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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자 수녀님이 삼랑진 송기인 신부님댁을 찾아오셨단다. 송신부님은 얼마 전 자가용을 처분하셔서 지리산 휴천재까지 오기가 쉽지 않으신데 이웃에 사는 젊은이의 도움을 받아 오늘 함께 오셨다. 보스코에 대한 송신부님의 사랑은 극진하다. 우리에게 진로를 열어주셨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극진히 보살펴주셨다.


친구 예찬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300

공소 식구이면서도 퍽 오래 못 만났던 도정 김교수 부부도 초대하고 스.선생 부부도 식사에 함께 초대했다. 초겨울 비가 스산한데 가까운 이들과 식탁에서 보내는 겨울 오후는 퍽 따스하고 제법 낭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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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치가 끝나면 설거지는 보스코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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