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5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13일. 20여년 전이던가? 호천이네와 '고추장 마을' 순창엘 간 일이 있다. 점심을 먹으러 유명하다는 한정식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집은 좁고 좀 큰방엔 두 상, 아랫방엔 한 상이 차려져 손님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밥상에 반찬 80첩을 올려준다고 소문난 그 집은 점심에 손님 세 상을 받되 한 상에 여섯 명씩만 받고 그것도 예약으로만 손님을 받는다며 야몰차게 우리를 거절했다.
아무튼 그 집에 미련이 남았던지 이번에 호천이가 친구 부부와 진도 가는 길에 그 집엘 들르겠단다. 문제는 예약을 하려니까 자기네 인원이 4명이어서 예약을 안 받는단다. "누나, 한 상에 여섯명을 채워야 예약해준대, 누나랑 매형이 와서 함께 들면 안 될까?" "가서 먹어주면 뭘 줄 껀데?" "함께 가는 내 친구가 안성에서 샤인머스켙 포도 농사를 짓는데 그거 갖다 줄게." "좋아, 그럼 가서 먹어주지, 휴천재에서 한 시간 거리거든."
그래서 순창엘 갔다. 산나물 들나물이 총동원되어 반찬 80여가지가 한상 가득한 음식들이 눈을 끌고, 20여년 전 음식을 만들던 두 아줌마들이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파파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우리 입맛이 고급해졌는지 아니면 음식이 유행을 타는지 맛보다는 호기심이다.
순창까지 간 길에 담양에 있는 성삼회 딸 수녀회에 들렀다. 거의 일년 만이다. 수녀님들은 여전했고 가을이 깊어가는 뜰엔 가을꽃이 한창이다. 소박하고 한결같은 삶이 주는 충만함이 곳곳에 스며있다. 이 수녀님들은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약하신 치마티 신부님에게서 당신네 창립영성을 찾는 분들이다. 우리 결혼 금혼식을 모든 수녀님들이 축하해 주며 '성가정 등불'이라는 성물을 선물해 주었다. 우리의 결혼이 다른 부부들에게, 특히 요즘처럼 결혼을 기피하는 세대들에게 '결혼도 해 볼만한' 삶이라고 비춰주기를 염원하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잘 살아야겠다.
어둠 속에 돌아오는 지리산 산길에서 생각한다. "나 혼자라면 이 산길을 달려 어두운 지리산 골짜기로 돌아올까?" 서로의 존재가 어둠 속에서도 별보다 더 밝아야 두 남녀를 기쁘고 포근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만든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많은 여인들이 내 나이에 과부로 살아가는 이가 많다 안타깝다.
토요일. 아침 8시 20분 서울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서울 영등포 살레시오 관구관에서 '살레시오 회원 부모 피정'이 있다. 빵고 신부도 만나 볼 수 있는 보너스도 있다. 2시 관구관에 도착했다. 빵고 신부를 보니 일이 많은지 많이 피곤해 보인다. 오늘 피정을 도우러 온 수련장 위원석 신부와 수련자 두 명도 많이 바쁘다. "살레시안들의 사인(死因)은 한결같이 과로사(過勞死)"라는 농담에 수긍이 가지만, 그래도 모두 밝고 행복한 표정들이어서 어미들의 마음에 안도감을 준다.
빵고의 수련동기의 부모님은 세 커플이 왔다. 그의 수련동기가 7명인데 나머지 부모님은 돌아가시거나 와병중이니 코로나와 작년 보스코의 수술로 못 만난 5년의 세월이 우리 삶을 한참 멀리 실어왔다. 이번에 모인 40여 명 부모 가운데 모르는 사람도 꽤 보인다. 그래도 살레시오회라는 큰 지붕 아래로 아들들을 보내 비를 피하는 동지들이니 금방 맘이 통한다.
토요일 저녁기도와 오늘 드리는 아침기도를, (살레시안답게) 핸드폰의 가톨릭 앱을 찾아 함께 드리는데 곁눈으로 언뜻언뜻 보니 엄마들 핸드폰은 켜자 맨 먼저 뜨는 사진들이 한결같이 수도자가 되어 독신으로 살아가는 아들의 사진이다! '며느리의 남자'로 변심하지 않은 아들이어서 저리도 애틋한 '소울 메이트'로 남을까?
수도원의 식사는 늘 맛있다. 엊저녁 박성재 신부의 첫번 피정 강론에서 들었듯, 살레시오(프란치스코 드 살레) 성인의 영성에 따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 사랑으로 서로 호감을 갖고(benevolezza) 기쁜 마음으로(compiacenza) 함께 동화되어(conformita’) 온유한 삶(dolcezza)을 살아간다니 음식도 맛있을 수밖에 없겠다. 그렇다면 우리 아들들 참 좋은 몫을 택했다. 늦은 밤까지 다과를 나누며 부모들은 코로나 이후 못 나눈 궁금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주일미사 후에는 김상윤 신부의 신학 강의를 들었다. 살레시오회의 3대 신심이 성체, 성모, 교황께 절대 복종이라며 '성모 신심'을 나 같은 개신교 출신도 알아듣게 설명하면서 도표로 그려 보였다. 하느님이 나자렛 처녀에게 베푸신 은혜를 하느님의 관점에서 믿고 알아듣는 도표였다.
보스코의 주일복음 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076
1박 2일 짧은 시간이지만 회원 부모들 사이에 서로간 정을 돈독히 하고, 육적으로는 잘 먹이고 영적으로도 잘 채워 주었다. 돈보스코가 어머니 맘마 말가리타의 도움을 기꺼이 받았으니, 지금 우리 부모들도 기쁜 마음으로 아들들의 수도생활을 어떤식으로든 함께하련다. 3시 20분 함양행 버스를 타고 돌아오니 저녁 7시.어둠은 깊고 별은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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