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5일 목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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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일 아침. 스무 날의 서울 나들이를 접고 집시처럼 주섬주섬 나그네 살림살이를 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집시처럼 길을 떠난다. 이번엔 곧장 지리산으로 내려가지 않고 부안 변산에 들르기로 했다. 도중에 동진강가 진구지라는 마을에도 들러 모두 고향을 떠나거나 세상을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을 동네도 기웃거리며 추억을 더듬어 보고 싶었다.


보스코의 대학 시절, 방학이면 부안의 동진강 수문옆 '진구지마을'에 내려와  친구네 집에서 지내곤 했단다. 친구 어머니는 해마다 정월 초면 금산사 어느 암자에 찾아가 당신 자녀들의 일년 신수를 묻곤 하셨는데 그해 따라 수양 아들 보스코 몫의 복채도 내고서 그해 신수를 물으셨단다. “? 이 총각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네!” “아이고 스님, 걔는 천주교 신부 된다는 총각이라구.” “신부는 무슨 신부야. 아무튼 두고 봐요.” 그러더니 그해 4월 수양 아들이, 웬 서울 처녀를  '달고 와서' 떡 그 집에 맡겨 놓고 몇 달 봐 달라 하고선 가버리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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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절도 없으며 천하에 얌전하기만 하던 저 총각이 뭔 일이랑가?” 놀라셨지만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처녀도 거두셨다. 나 어렸을 적 부잡하게 놀다가 무릎이라도 다쳐 울면서 집에 들어오면 엄마가 나더러 어머, 우리 호박이가 굴렀네?”놀리시며 아까징끼를 발라주시곤 했는데 그 호박이 넝쿨에서 떨어져 나와 부안까지 굴러간 셈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누에를 치느라 뽕잎을 땄고 밤이면 옆방에서 누에가 뽕잎 먹는 와삭와삭소릴 빗소리처럼 들으며 잠들었다. 난생 처음 농사일도 도와 고추모도 심고, 모심을 땐 모밥도 이고 나가고 부안어머니따라 채소를 이고 장에도 나가는 등, 내 생전 해보지 못했던 온갖 시골 일을 다해 보았다. 먼 훗날 지리산 휴천재 텃밭농사를 준비한 몇 달 간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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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0월 3일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부안 어머니와 함께산행차림으로 서해 변산반도의 채석강으로 떠나서 보스코가 아는 어느 스님 주선으로 장성 백양사에서 하룻밤을 얻어 자고 이튿날 동진강 옆 진구지마을에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고서 우린 버스를 타고 격포 채석강까지 가서 너럭바위에 텐트를 치고서 신방을 차렸다사람 하나 안 보이는 채석강 전부를 차지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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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생활에 관한 한, ‘완벽한 무능력을 갖춘 신랑이 버너와 코펠로 쩔쩔 매며 해준 설은밥이며 신부가 끓여낸 된장찌개가 전부였지만 얼마나 행복했던지 세상 천지에 부러운 게 하나도 없었고 그 널따란 채석강과 끝없는 바다가 다 우리 것이었다.


어제 서울을 떠나 여러 고속도로를 번갈아 타면서 다섯 시간쯤 차를 운전해 내려가서 이번에는 작은아들이 줄포에 예매해준 제법 비싼 호텔에 짐을 풀었다. (동화에서는 자정이 되면 마차가 호박으로 변하고 마부가 생쥐로 변신하는데, 우리 버전에서는 신데델라가 마부로 변신하고 유리구두는 운동화로 바뀌지만왕자님은 그대로 마차 타신 왕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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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앞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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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와 만조에 호텔 창 앞까지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저렇게 연달아 밀려오는 물이랑처럼 은총의 물결에 떠밀려 50년을 살아왔구나 하며 행복에 잠겼다. 패친들이 보내온 금혼식 축하인사와 격려에 짤막한 답인사를 쓰면서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행복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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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은 '모항해나루'는 가족호텔(콘도)이어서 성수기 외에는 식당운영이 없어 신혼부부들처럼 아침 바다를 내다보며 침실로 날라다 주는 모닝  커피를 들겠다는 모처럼의 계획은 접어야 했다. 앞바다를 바라보며 아침기도를 드리고 평소처럼 아침상을 차려 먹고 호텔을 나와 물이 빠지는 썰물에 맞춰 채석강엘 갔다. 채석강 경관은 그대론데, 앞바다 역시 훨씬 넓었던 듯한데, 반세기 지난 지금은 변산반도가 해수욕장과 숙박업소들로 바다를 가득 메워버린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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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밀물과 오늘 썰물의 채석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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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과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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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에 전주에 사는 후배 김은경 목사가 우리 금혼식 축하로 점심을 내겠다 해서 전주에 들러 걸게 차린 맛있는 한정식을 대접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북에서 기장 총회장도 지낸 여목사로서 내가 김목사를 알게 된 것은 한신선후배로보다는 광주 지역 운동권 찬성이 서방님에게 젊어서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처녀라면서 소개 받아 맺어진 친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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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 간 김에 새로 맞춘 보스코의 보청기도 찾고, ‘효자공원묘지에 계신 아버님 묘소를 찾아 벌초를 하고 때늦은 성묘를 하기도 했다


여행과 축제로 20여일을 보내고 돌아오니 지리산은 널따란 치맛자락에 변함없이 우릴 맞아준다우리가 쉬러 마지막에 돌아오는 곳은 늘 결국 산속이니 아무래도 우린 바다보다 산과 더 친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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