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8일 목요일. 맑음
26일 오전에 장가계 방문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천문산(天門山)을 오르고 점심 후 장가계를 떠나 다섯 시간만에 장사(長沙)에 도착하여 하룻밤 묵고 장사 공항에서 인천 가는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이번 여행은 끝났다. 대자연의 위용에 완전히 압도당하는 겸허함을 배우는 길이었다.
산길을 많이 오르내린다는 예고가 있어 (거금을 들여) 지팡이도 구입했는데 한 번도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우리가 잘 걸었다기보다 수백 미터 넘는 벼랑에다 완벽하고 안전하게 포장된 잔도(棧道)를 개설하고 그만한 높이의 절벽에 엘리베이터와 케이블카, 에스칼레이터를 갖춰 놓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르내리게 장만해 놓은, 그야말로 '사회주의적 관광 코스' 덕택이었다. 하루 서너 시간 무리 없이 걸으면 그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고, 장가계 일대에 관한 한, 숙박, 교통, 식사 등에서 ‘완벽했다’. 10년 간격으로 네번째 중국을 방문한 내 눈에는 중화민국의 엄청난 경제적 문화적 발전이 실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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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천문산을 내려와 점심을 먹은 식당 옆에 화가 이군성(李軍聲) 미술관이 있었다. 토가족 화가로 아름다운 장가계 풍경과 가난하지만 지붕을 맞대고 사는 마을의 모습은 참 정겨웠다. 자기가 태어난 곳과 이웃들에 대한 화가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 그림의 모든 자료를 그 지역에서 나오는 돌과 그 가루로 만들어 쓰고, 자연접착제에 뿌리는 프레스코 화법에 가까워, '사석(砂石) 화법'이라고 불리는 그의 작품들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단다.
나는 천자산과 천문산 기암절벽 그림이 마음에 든다니까 올케 정분이는 소박한 산골집에 빨래가 널린 마당이며, 닭들이 뛰노는 그림이 좋다고 했다. 아내의 말을 곁에서 들은 호천이가 가이드에게 "저 그림이 얼마나 나가죠? 한국으로 보내는 송료는 얼마죠?" 물으며 그림마다 붙은 가격표(가격으로 300이 붙어 있었다)를 들여다보자, 깜짝 놀란 아내가 "그림이 좋다는 말이지 사겠다는 말은 아니에요."라며 남편을 만류한다.
남편은 “울 엄마가 살아 계실 때 싫다는 말 한마디 없이 몇 해를 두고 오줌, 똥 다 치워드리고 그렇게 고맙게 돌봐드린 효성이 고마워서, 천만원 대도 아니고, 억억하는 물방울 다이아도 아니고 나도 이 정도는 사줄 수 있다구!” 라고 우기는데도 아내의 완강한 만류에는 손을 들고 말았다. “저렇게 설쳐 대니 뭐가 좋다는 말을 못해요.” 젊은 시절 남편 따라 엄청 가난하게 고생했고, 울 엄마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부부여서 서로에 대한 사랑도 극진하다.
보스코더러 “당신은 왜 나한테 그림 사주겠다는 말을 안 해요?” 물으니까 “다 당신 돈이잖아? 난 돈 없잖아?”란다. 실제로 모든 돈은 내 손에 있고 내가 채워 넣지 않으면 빈 지갑인 줄도 모르고 외출하는 일마저 흔한 보스코. 딴 일에서도 '손이 많이 가지만' 재정에 관해서도 '거의 완벽한 무감각'의 소유자다. 이번 여행에서도 부부가 가게에 들어가 함께 의논하고 함께 사는 올케네지만, 보스코는 가게도 슈퍼도 따라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난 여러모로 손해다.
이번 여행에서 정말 원 없이 먹은 과일이 망고다. 보스코는 한 두 쪽 먹는 시늉만 하고 나 역시 서너 쪽이면 끝인데 호천네는 열 개나 되는 망고를 까서 한정 없이 먹는다. “그렇게 맛있어?”라는 내 물음에 “어머님이 엄청 좋아하신 과일이에요.” 란다. 달고 부드럽고 향이 있으니 이가 부실한 엄마에게 찾아갈 적마다 사다 드리다보니 맛을 익힌 듯하다. 부부가 입맛마저 시어머니 식성에 맞추어 길들여지다니!
호텔을 나와 10시 쯤 장사 공항에 도착하여 ‘단체 비자’로 함께 온 여덟이 다시 만나 KAL기를 탔다. 12시 30분에 이륙하여 4시 30분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장기주차’ 했던 내 차를 타고 호천네 들러 저녁까지 얻어먹고 집에 오니 밤 10시.
올케가 아쉬움이 남은 한마디를 한다. “저 지팡이 한 번도 못 썼으니, 지팡이 짚으러 우리 여행 또 떠나요.” 그게 언제일지, 가능한 일인지 아직 가늠을 못하겠지만 올케는 모든 언행이 참으로 ‘귀여운 여인’이다.
오늘 새벽부터 세탁기를 세 번 돌렸다. 입었든 안 입었든 밖에 나들이 간 옷은 언제나 다 빨아왔다. '50년차 주부'로서 가전제품 중 '꼭 한 가지만 남겨야 한다면' 단연 세탁기를 꼽겠고 이것은 대부분의 주부들이 공감하리라. 뽀도독 소리가 나도록 햇볕에 말려서 본디 있던 자리에 다시 개넣고 나면 잠시 일상에서 떨어져 나갔던 여행이 매듭을 짓는다. "여행이 필요한 것은 자그마한 우리 집구석을 전보다 더 아끼게 만들어주는 까닭이다"라는 시인(Noel Clarasó)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원칙도 새삼 배웠다.
얼떨결에 떠나자
기대는 조금만 하고 눈은 크게 뜨고 짐은 줄이자
어디라도 좋겠지만 사람과 엉키지 않는 순수한 곳이라면
만사를 팽개치고 뒷일도 접어 두자
여정에 뛰어들어 보물이 들어나면 꿈꾸던 보자기마다 가득히 채워오자
문물을 얻지 말고 세상을 담아오자 태엽을 달아 늘어지게 우려먹자
돌아오면 바로 어디론가 곧 떠날 준비를 하자. (임영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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