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21일 목요일. 흐림


20일 수요일. 저리도 비가 지치지도 않고 내리다니. 여름이 다 가고 입추 처서도 지났는데 어째 절기 지나는 걸 눈뜨고도 못 보나? 선영이가 물을 채워준 마당의 돌절구들엔 새들이 내려와 마른 목을 적신다. 큰절구엔 뚱뚱한 비둘기, 널따란 절구엔 참새 서너 마리가 둘러앉아 어서 먹고 가자는 듯 물을 넘긴다. 비는 철철 내리는데, 빈 배를 물로들 채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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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에 점심을 서둘러 먹고 보훈병원에 보스코 심장과 폐, 그리고 무호흡증 치료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다. 3개월마다 검진받고 약을 타오는데 예약일자가 참 빨리도 돌아온다. 나이만큼 세월의 굴레바퀴가 커지고 그만큼 빨리도 인생이 굴러가는 듯하다.


요 몇 달 우리집 우국지사는 초저녁에 한 잠을, 그것도 두어 시간 자면 깨어나서 서재로 나가 날 밤을 샌다나도 남편 걱정에 밤마다 선잠을 자니까 낮이나 밤이나 늘 피곤하다. 어제 새벽에 깜빡 잠들었는데 흉한 꿈을 꾸었다


보스코가 장대 같은 키에 얼굴이 희멀건 남자와 함께 내 눈을 피해서 부지런히 집을 나간다. 한눈에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길 건너 언덕길을 달음질로 오르는데, 나도 둘을 뒤쫓느라 나뭇잎에 가렸다 보였다, 놓쳤다 찾았다 정신없이 따라갔다. 어떤 까페에서 둘이 무슨 얘긴가 열중하는 것 같기에 몰래 뒷문으로 다가가니 눈치를 채고 어느새 둘 다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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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로 갔을까 헐레벌떡 찾아 오르다 보니 덩치큰 남자의 대머리가 옆길로 언뜻 보였다. 내가 달리자 그들도 미친듯 뛰어 도망간다평소에 노인걸음으로 느릿느릿 걷는 보스코가 왜 필사적으로 나를 피해 달아나는지 알 수 없어 서럽고도 속상해 앞을 가던 여자들을 밀치고 달려가 그 사내를 꽉 잡았다. “왜 우리한테 이러는 거에요? 그러면 안돼요.” 하면서 내 눈에서 왈칵 눈물이 솟아나는데 그 눈물이 닿자마자 그 사내는 점점점 녹아내리며 사라져버렸다.


혼자 남은 보스코는 그제야 문득 제정신이 돌아온 듯 왜 그러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본다. 보스코의 밤잠을 빼앗아 이리저리로 상념의 세계로 끌고 다니는 정체모를 유령이 몹시 미웠나 보다. 보스코가 하도 밤잠을 설치다보니 무슨 흉조 같아서 오래오래 불안감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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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비마저 내리니 천호동 가는 길이 두 배나 걸리고, 병원에도 웬 사람이 그리도 많은지 퇴근시간이 다 되어 약봉지를 들고서 병원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은 27km되는 직선길을 두고 순환고속도로(100)를 돌고돌아 두 배 넘는 길로 집에 왔다.


내일 5박 6일 여행을 떠난다. 103일이 우리 결혼 50주년(금혼식)이고 내 남동생 호천이 칠순이어서 두 쌍이 함께 가는 중국 여행이다. 유럽은 많은 세월을 살았고 가까운 친구들도 다 떠나고 없어 다시 가고픈 생각이 없어졌다어디든 다정한 벗들이 있어야 봄도 봄이고 정든 곳도 정이 가는 이치려니... 보스코에게는 아직도 알프스에 미련이 남아 있지만 지리산에서 눈만 뜨면 바라보는 게 산인데...’라며 나는 한사코 반대한다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기도 힘들어져 장가계를 찾기로 했다. 그곳도 산이다. 중국에서는 구글이 안 되고 홈피도 작동 안된다니 돌아와서나 일기와 사진으로 얘기를 나눌 까 한다지리산 문정마을에도 '장가계' 다녀온 할메들이 여럿 있는데 기념 선물로 사온 게 참깨 두 되'라던 말에 웃음이 절로 났다1986년 유학에서 돌아오며 들른 홍콩-마카오 방문,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참석, 2013년 사천성 관광에 뒤이은 여행이니 10여년에 한번씩 찾아간 셈이다.


오후에 저녁산보와 로사리오를 나섰는데 이재명 체포동의안 국회통과 소식이 떠서 가슴이 철렁했다. 2004년 노무현 탄핵을 일으킨 민주당내 기회주의자들이 20년 후에 야당 대표를 검찰의 손아귀에 넘기는 정치파탄을 다시 일으켰다. 윤가의 전횡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내년 총선을 벼르던 국민들을 완전히 절망에 빠뜨리고 말았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두렵다는 민주혁명의 비극을 다시 겪은 셈이다어젯밤 흉몽이 떠오르며 "보스코는 오늘밤도 잠자기는 글렀다"는 탄식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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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산보를 포기하고 올라오다 우리 동네 생태 텃밭을 둘러보았다. 목화밭 한켠에서는 목화가 피고, 한켠에서는 아직 파랑 다래가 달려 있고, 저쪽엔 목화가 하얗게 벌어져 있다. 다래가 달착지근하다고 따먹어 버리면 목화는 안 피듯이 역사의 아픈 도정은 참으로 길고도 지루하다. 메밀밭도 하얗게 폭죽을 터뜨리는 이 아름다운 초가을인데 이 나라엔 언제나 민주화의 열매를 맺고 민족 화해의 열매를 거둘까이 아낙의 길고 깊은 한숨에 섞여 박노해 시인의 가을 몸의 한 구절이 절로 나온다


이 몸 안에 무엇이 익어가느라 이리 아픈가

이 몸 안에 무엇이 비워 가느라 이리 쓸쓸한가

이 몸 안에 무엇이 태어나느라 이리 몸부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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