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12일 화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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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2층 거실엔 쓸만한 식탁과 식탁의자가 있다. 15년전 서울집 이웃 아저씨가 내다 버린다는 것을 얻어다 지리산까지 실어와 사용하는 중이다. 그 아저씨는 자기 집안의 잘사는 형님이 이사를 가며 이 가구를 줬는데, 그 작고 좁은 집 마루에 들여놓으니 사람이 집안을 돌아다닐 수가 없더란다. 18평에 방이 셋이라 가구가 탐나서 가져왔다지만 무용지물이더라나.


다섯 개 의지를 20여년 넘게 쓰다 보니 나무는 멀쩡한데 그 세월에 내 얼굴에만 주름지는 게 아니고 의자 가죽도 주름지고 터지고 찢긴 곳도 생겼다. 가죽을 갈아야 해서 ‘배달의 진수막내동생에게 S.0.S.를 쳤다. 탑차로 24시간 택배를 하는 베테랑이라 가격과 방법이 즉시 나왔다. 의자 5개를 택배로 서울 응암동에서 리폼하는 집까지 실어가고 리폼이 끝나면 다시 택배차를 잡아 휴천재로 실어오면 된단다. 참 편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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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4시 택배 아저씨가 왔다. 보스코가 2층 마루에서 하나씩 들어내리고, 휴천재 골목길이 초행인 사람은 트럭으로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아 한길가 문정식당 앞까지 진이 엄마가 트럭으로 실어다 주었다. 우리 막내 호연이의 차량은 멋진 탑찬데 오늘 온 트럭은 1톤 트럭에 쇠기둥을 구부려 박아 텐트를 친 가난한 택배 차량이었다. 기사도 기운이 하나도 없는 왜소한 체구가 측은해 보였다. 우리 막내동생이 누나, 우리 업종은 끼니 챙겨 먹는 게 쉽지 않아요.’ 하던 말이 생각나 음료수와 조각 케이크, 깎은 배를 챙겨주었다.


살레시오 양승국 신부님이 지리산 피아골 피정센터에 오셨다는 전화. 광주교구 사제단 피정에 강론을 하러 온 길이며 오늘 휴천재에 들리겠단다. 90년대 말 우리가 로마에서 두 해 안식년을 보내며 그 당시 살레시안 대학교에서 공부하시던 처지라 가까이 지냈다. 시인이자 명문장가여서 근자에 매일 아침 띄우는 양신부님의 유튜버 복음 묵상을 우리 부부가 아침기도 때 낭독하면서 더 가깝게 느껴지는 분이다.


https://www.mariasarang.net/bbs/bbs.asp?index=bbs_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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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신부님들께 오전 오후 한 시간씩 피정강론을 하는데 지리산 피아골의 초가을 풍경이 너무 좋아 오전 한시간 반을 강론하고 오후엔 피아골을 거닐며 묵상하시라니까 신부님들도 퍽 좋아하시더란다. 보스코의 교수시절을 회상하면 학교 사정으로 휴강하면 학생들 못지 않게 교수들도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학생들은 돈 내고 공부하면서도 휴강을 반기고, 교수들은 강의 않고 돈받으며 휴강을 반기는 모양새이지만, 아무튼 노는 여유는 누구나 좋아하니 이 무슨 심사일까?


구례 피아골이면 지리산 천왕봉을 두고 함양 문정리와는 정반대다. 양신부님은 무려 한 시간 반을 달려 휴천재를 방문하셨다. 로마에서야 살레시안들이나 아는 신부님들이 집에 오시면 한식을 해드렸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스파게티와 쇠고기 슈트, 샐러드, 올리브유에 재운 가지 구이를 해드렸다. 우리가 아침마다 성무일도 후에 신부님 글로 영적 독서를 한다니까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신다. 저 나이에도 소년 같은 순수함과 겸손함이 그분 글을 꼭 닮았다.


오후에 잔디밭에 풀을 뽑고 있노라니 드물댁이 올라와 텃밭 배추와 무에 벌레가 생겼다고 약을 쳐야 한단다. 아침에 보니 상추와 몇 포기 안 남은 루콜라에도 전에는 못 보던 벌레가 생겨 한참을 손으로 잡았었다. 우선 줄지어 심은 열무를 한 구멍에 두 개 남기고 나머지는 솎아 열무김치를 담기로 했다. 큰 소쿠리로 하나 가득이요 요즘은 열무김치 담는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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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댁한테서 붉은 고추를 얻어 반은 채를 쳐서 백김치에 넣고 나머지는 빨간 열무김치를 담갔다. 삶은 감자와 배를 갈아 넣고 드물댁은 부추와 마늘을 다듬어 주었다. 10시가 넘어서야 김치가 끝났다. 어찌나 많은지 내일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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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3시엔 빵고신부가 미루의 시어머님 빈소에 와서 영결 미사를 드렸다고 미루가 사진을 보내왔다. 인연이란 묘해서 여러 사연으로 얽히게 마련이니 떠나는 날까지 남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더 써야 한다. 세상을 떠나는 이들에게 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와 기억밖에 없음에서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가난하고 사랑하기에도 얼마나 날수가 적은지를 실감한다.


가을의 첫 추위에 숲 속에는 우수수 지는 잎새 얼마나 많은고.

차가운 계절이 바다 너머로 좇아 따사로운 땅으로 몰아넣을 제

새들은 한 바다에서 뭍으로 얼마나 많이 모여드는고

                      (베르길리우스 “에네이드”[최민순 역] 6,309-312)


며칠 새에 보스코가 서강대에서 함께 근무한 길희성 교수(종교학과)와 정의구현사제단 배달하 신부의 부고에 접했고, 보스코의 중고등학교동창 이재준씨의 부고광주교구의 정평위원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증인으로 활약한 김양래씨의 부고도 받았다계절이 가을이어서 하고많은 이들이 자기 운명 앞에 겸허히 고개를 숙이고 당신네 가을걷이를 알려오는 중에 보스코도 자기 이름자(稔: '곡식 익을' 염)대로 벼(禾)가 익어 생각(念)에 숙이듯이 지인들의 연달아 오는 부고에 요즘 유난히 생각이 깊은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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