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9일 일요일. 비
금요일. 토요일 새벽에 서울 가려면 여러 가지 푸성귀를 챙겨야 한다. 부추는 베고 루콜 라도 순을 질러주면 다시 밑에서 올라온다. 운봉성당에서 루콜라와 바질 농사를 기막히게 잘 짓던 이정석 신부님께 한수 배운 것이다. 신부님이 운봉에 계실 때는 가끔 주일미사를 갔고 미사 후 언냐들이 해주는 맛있는 점심상을 대접받곤 했다. 할머니들이 각자 찬거리를 장만해오시는데 그분들이 힘들 것 같아 주일미사 후의 점심식사를 그만 하자고 신부님이 제안하셨단다. 그런데 언냐들의 대답은 "지금 거둬 놓은 쌀이 좀 남았는데 그거 다 먹을 때까지만 하겠다."였는데 한 달이 가고, 세 달이 가고, 한 해가 가도 쌀이 안 떨어지더란다.
이스라엘의 그 엄청난 기근에 엘리야 예언자가 만난 '사렙타 과부',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라던 과부가 '하느님의 사람'을 대접한 선심 덕분에 온 나라 기근이 끝날 때까지 바닥이 비지 않던 밀가루 단지처럼, 운봉 성당 쌀독은 쌀이 떨어지지 않더란다. 내가 알기로는 이신부님이 전주로 이임 가시기까지 운봉성당 점심식사는 계속되었다.
식사 후면 신부님은 당신을 찾아간 우리에게 손수 커피를 내려 주셨는데, 우리가 설거지를 하려고 나서면 "라파엘라가 자기 일 간섭받는다고 화내요."라며 말리셨다. 식복사 없이 혼자 지내시던 라파엘 신부님이 언제 식복사를 두셨나 궁금했는데, 손님들이 가고 나서 신부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들어가면 '라파엘라'로 변신하셨던 것이다.
지금은 많은 훌륭한 사제들이 파출부도 식복사도 두지 않고 혼자서 세 끼 식사를 해결하는 삶을 살고 있어 교우들에게 깊은 감명과 더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서양에서는 더하다. 사제의 엄마된 내 심정으로는 그런 삶이 청빈하여 좋은 일인데도 실은 마음이 아프다.
목요일 외출 후 돌아와 보니 휴천재 정자가 수리되어 있었다. 1994년에 집을 지으면서 '작은 거인' 진이아빠가 지은 정자인데 30년 되자 최근에 기둥 하나가 썩어 내려앉았다. '친절한 잉구씨'에게 어떻게 손써 달라 부탁했더니 두 친구를 데리고 와서 든든하게 고쳐주고서 말없이 가버렸다.
토요일 아침 일찍 휴천재를 떠나 덕유산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최근 우리는 식사를 싸들고 다니는데 하필 휴게소 '흡연구역' 가까이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흡연인구에 여성이 많아졌고 남녀를 불문하고 늙은 원숭이처럼 눈치를 힐끗 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모습들이 가엽기조차 하다. 이젠 흡연자가 전세계 어디서나 푸대접을 받아 집에서마저 방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집밖으로 쫓겨나면서 남의 눈치를 보는데 아직도 담배가 그리 피우고 싶을까 궁금하다. 보스코도 아예 담배를 안 피우고 나도 입에 대본 적이 없어 애연가들 처지를 좀처럼 이해 못한다. 더구나 서울집 우리 골목에 앞집 5층짜리 원룸 건물 테라스들에서 던지는 꽁초가 골목에 수북하여 상경할 때마다 빗자루질을 하는 터라서 더 그렇다.
서울에 도착하고 잠깐 '큰딸'이 다녀가고, 몇 달 비운 집안 청소를 하고, 오랜만에 '토요특전미사'에 갔다. 어린이 미사여서 생기 있어 좋았다. 손님 신부님이 강론에서 "어린이 여러분, 하루 중 언제가 가장 행복해요?" 물으니 어린이들이 일제히 "잠들기 전요!" 라고들 대답하였다. '저건 생활고에 지친 어른들이 하는 대답인데?' 아아, 어린이들마저 인생이 저렇게나 힘들까? 공부, 공부, 또 공부라며 학원으로 뺑뺑이 돌려지는 우리 어린이들의 심경을 알 만하다.
우리가 늙어갈수록 새벽에 눈뜰 적마다, 성무일도에 나오는 기도대로 '새로운 이 하루를 다시 볼 수 있음이 너무 고마운 일'임을 절감하지만 "이 하루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해주소서."라는 기도문도 나온다. 헌금 시간에 Q.R.판에 핸폰을 대고 가는 모습은 아무리 '스마트폰시대'라지만 좀 생소해 보였다.
오늘 일요일. 9시부터 비가 온다 해서 아침 일찍 나는 잡초가 가득 자라 오른 마당을 손질하고 보스코는, 김원장님네 전동가위를 들고 온 참이어서, 비 오기 전 마당의 큰나무들을 전지하겠다고 나섰다. 사실 나로서는 전동가위의 위력에 두 가지 공포를 갖는다. 그가 높다란 사다리를 겁 없이 타고 오르는 것과, 사다리가 놓이는 자리에 살아있는 화초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거다. 오늘도 사다리가 지나간 자리에 노랑달맞이들이 긴 세월의 영화를 짓밟힌 채 생을 마감했다. 서울에서는 막 자리잡은 영산홍도 수국도 짓밟혀 주부의 애간장을 태웠다.
보스코는 비자나무 아래에 한 길 넘게 자란 새가지들을 모조리 쳐내고 대문간의 커다란 산수유나무를 대대적으로 잘라냈다. 그가 나뭇가지를 큼직큼직 잘라서 아래로 던지면 서울집 뒷산 큰 나무 뒤 사람들 안 보는데 갖다 버리고 오는 것은 내 몫이다. 가지 채라면 100미터 넘는 골목길을 끌고 가기 쉬운데 전동가위질이 재밌는지 토막토막 자르는 그의 놀이를 위해 나는 서너 배 생고생을 해야 했다.
어제 왔던 엘리 말이, 나나 둘째 '순둥이'나 집 가꾸는데 이력이 났는데 자기는 지금 아파트에 살다 보니 '난 단독 체질은 아니었나 봐.' 하는 느낌이 들더란다. 우리도 점점 기운이 빠져 나무 손질도, 마당 손질도 힘들어진다. 그래도 내겐 아파트살이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오늘 앞집 지붕 위로 무섭게 쏟아지는 빗소리와 지리산 숲속에 지는 빗소리도 비교해 본다. 저녁식사 후 큰물진 우이천변을 걸으며 '언젠가는 이 산보도 힘들어 못 나오는 날이 오리라'는 생각에 아파트 사는 사람들을 측은하게만 볼 일도 아닌 성 싶다. 실상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의 아파트 공화국'으로 바뀐 현상은 가정주부들의 소원이 아파트 생활이기 때문이다.
핸폰에서 바티칸 뉴스를 검색하던 보스코가 빵고네 살레시오회 총장 아르티메 신부가 추기경에 서임된다는 뉴스를 반겼다. 그분과는 로마에서 몇 차례 만난 적 있었다. 수도회로서는 영도력 있는 총장신부가 고위성직자로 발탁되어 가는데 서운도 하겠지만(주교 이상의 고위직이 되면 수도회 소속에서 면제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으로서는 작년에 벨기에 겐트 교구장 반로이(살레시안이었고 한국에서 선교사와 수도회 장상을 지냈다. 한국 이름 '윤선규')주교를 추기경으로 발표했다가 본인이 고사했던 아쉬움을 이번 서임으로 대신한 듯하다.
추기경에 서임되는 아르티메 총장신부(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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