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4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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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새벽 다섯 시만 넘어도 한낮이다. 장미 소식이 너무 급급해 커튼을 연다. 비가 그치고 해가 나자 휴천재 담장의 분홍 덩쿨장미가 만개했다. 기특한 것! 어떻게 비 내리는 시간을 피해 저리도 곱게 피었을까! 이웃 동네에서 곶감 하는 아저씨는 곶감이 본업인지 장미 키우는 게 본업인지 60여 가지 장미의 이름과 얼굴을 열거하면서 서너 가지에도 감지덕지 바라보는 나의 기를 팍팍 죽인다


그러나 우리 마당의 이런 꽃마저 없는 이웃 아짐이 와서 곱다고 부럽다고 하면 제일 실한 가지로 뚝 끊어 가슴에 안겨드린다. 그게 고마워 아짐은 함박 웃음을 한 아름 나한테 보내는데 그 웃음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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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설거지를 하려던 보스코가 뭔가 발견하고는 빨리 가서 숨어!’라고 속삭인다 나이가 들어선지 그는 식탁에 어정쩡거리는 파리도 죽이기를 꺼린다. 아니나 다를까! 한뼘이나 되는 지네가 스므 쌍도 넘는 다리로 부지런히 도망간다. 비온 후 습하고 온도가 올라가는 늦봄이면 지네의 출몰이 잦다


나는 집안에 불법침입 하는 해충은 죽이는 걸 방침으로 하는데(물론 청개구리와 뱀은 쓰레받이나 쓰레기통에 담아다 창밖으로 내보내며 '다시는 우리 집에 들어오지 마라'고 타이르곤 했다) 쌍으로 다니던 지네가 이불 속에서 보스코를 한번 물었다가 응급실까지 실려간 뒤로 지네는 내게 반갑쟎은 손님이 되었다.


이층 마루방 개수대 근처에 쌓인 병들을 모조리 치우고도 지네가 안 보인다. 그런데 타일 벽 귀퉁이에 조그만 구멍이 보여 거기다 스프레이를 뿌렸더니 지네가 못 견디고 자기 소굴에서 기어나왔다. 지네에게 스프레이를 뿌렸는데(이런 내 모습은 이탈리아 쟌캬를로 신부님한테서 'Sullan sanguinara[피 보는 술란]' 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틀이 되는 오늘 아침까지도 다리를 떨며 질긴 목숨을 부지하고 있어 보기에 영 맘이 안 좋았다. 보스코가 가까이 가더니('안락사를 시키려나?') 파리채 위에 그걸 올려서 창밖으로 보낸다. '어차피 죽은 목숨인데 다른 벌레의 먹이라도 되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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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 남호리. 보스코가 사다리 둘을 길게 이어 이웃 밭 축대에 기대 놓고 올라가 가능한 모든 연장을 동원하여 풀들을 퇴치한다. 주적은 야생복분자와 칡. 첫해에 땅바닥에서 오르는 것들은 괭이와 낫으로 뿌리채 캐냈지만 높다란 바위 틈에서 길게 길게 뻗어내리는 복분자 가시는 정말 보기 흉하다. 그가 사다리를 오르면 내가 오금이 저린다. 나도 낫을 들고 손이 닿는 복분자와 칡, 그리고 미국자리공을 찍어냈다. 축대 절반을 마치고 '오늘은 여기까지!' 우리 손이 지나간 자리는 훤하다. 식물과 사람의 인내력 싸움이다반나절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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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에는 산청 성심원의 '어울림 축제'에 갔다. 10여년 전 오상선 신부님이 계셨을 때 성심원과 산청 주민들과의 소통과 연대를 위해 마련한 축제다. 50년대에 생긴 한센씨병 환우들의 마을이지만 그곳 환우들이 생계유지로 닭을 키워낸 계란을 보고 아직도 이 동네 문정리 아짐들이 '문디 계란'이라고 부르는 거리감을 줄이는 뜻에서 개최하는 모임이다. 


10년전 그곳 공연에 무료로 와주었던 정태춘과 박은옥 부부, 그리고 만담가 김제동씨가 다시 와 주었다. 여전히 무료공연! 저녁 5시부터 한 시간 반의 정태춘 부부의 노래 공연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에 잔잔하면서도 서글픈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장서방네 노을’, ‘촛불’, ‘북한강에서’, ‘시인의 마을’, ‘떠나가는 배’, 그리고 그가 자리에 일어서서 열창하던 ‘92년 장마, 종로에서!’ 서울 우이동 살던 박희진 시인은 정태춘을 '현대 한국사회의 음유시인(吟遊詩人)'’이라고 격찬한 적 있다


7시에는 한 시간 동안 김제동 씨의 '힐링토크'로 정말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치사하게 이를 데 없이 통치하는 현정권의 술수와 태극기 부대의 댓글 성토와 보수언론의 집중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날카롭고 유쾌한 그의 만담은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미루네 부부와 임신부님 오누이, 우리 둘에게는 오늘의 시대적 울분을 소화시키는 '힐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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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요일. 미루네가 임신부님 오누이를 모시고 공소 미사 오는 날이다. 어제 만났으면서도 우리가 별나게 반가워하면 공소식구들에게 위화감을 줄까 봐 미루는 내게 "오랜만에 뵙겠습니다."라고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미사 후 주부들이 마련해와 펼치는 아침식사는 언제나 유쾌하고 푸짐한 아가페다. 


오늘과 내일 한국염 목사와 임실 문섐댁에서 '여자들끼리 뭉치기로' 한 날. 그런데 한목사 남편 최의팔 목사님이 갑자기 허리가 탈 나서 못 내려오고 가을로 만남을 미뤘다. 주부가 되면 여자들끼리 한번 만나기는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 만큼이나 어렵다


그래서 보스코는 오늘 배밭의 배를 마저 솎고 나는 축대 밑 영산홍에 부직포를 씌우고, 파밭도 매고, 시든 감자 줄기에서 감자도 캤다. 텃밭이 있으면 무료로 주는, 무인 식료품 판매대를 가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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