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20일 목요일. 맑음


비가 비 같지도 않으면서 휴천재 이층 테라스 나무 바닥이 젖을 정도만 내린다. 슬퍼도 펑펑 울 형편이 못 되는 국민의 마음 그대로다. 어제가 4.19였는데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이 뒤숭숭할까 뉴스도 보기 힘들다. 4월 혁명으로 쫓겨난 무리가 집권하여 민주세력을 '사기꾼'이라 불렀으니 금년 4.3 제주에 '서북청년단'을 파견한 심뽀  그대로다.


딸들은 나더러 적어도 오늘 하루는 쉬라지만 내 마음을 나와 같이 알아줄 사람은 "여보, 내가 텃밭에 내려가서 예초기 준비하고 당신 기다릴께." 라고 한다. 남이 뭐래도 내가 뭘 할 것인지를 아는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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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텃밭 밭고랑에 겨우내 멋대로 자란 풀들, 민들레 곰보배추 등을 낫과 괭이로 찍어냈다. 보스코는 그걸 실어다 버리고 둘이서 감자밭 이랑옆 고랑마다 부직포를 깔았다


드물댁이 구경 와서 "풀은 매면 되는데 와 부직포를 까노라 고생하노?"라고 지청구다. 보스코는 "흙도 해를 봐야 한다. 잡초라는 풀이 땅을 얼마나 기름지게 만들며 땅속 벌레들에게 얼마나 이바지하는지 아느냐?"며 말리지만 뻗쩡다리가 되어가는 내 다리로는 굽혀서 풀 뽑기가 너무 힘들어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부직포를 깔고 몽둥이로 두드려 핀을 박으면서 평소 쌓인 스트레스(내 주변 사람들 말로는 전순란이 스트레스를 준다지만)를 팍팍 풀고,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앉은 길에 감자 옆에 풀도 뽑으며 자연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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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실로 오랜만에 예초기를 돌려 텃밭 주변과 배나무 밑의 풀들을 베고 있는데 때마침 후두둑 소나기가 내리자 일손을 접고 집으로 올라가 버렸다. 30분만 더 하면 깨끗이 베냈을 텐데. 속으로 하늘의 변덕에 투덜대며 나는 빗속에서도 일을 마저 끝냈다. 내게는 밭일을 노()이라 생각 않고 놀이로 생각하니 어제 하루도 산수갑산 꽃놀이를 한 셈이다.


휴천재 앞마당 끝에는 화단이 있다. 그런데 두더지들이 한 소대쯤 살고 있어 사방이 구멍이고 잘못 밟으면 종아리까지도 푹 들어간다. 그 자리에 고춧대를 박고 팻트병을 거꾸로 꽂아 바람에 떠는 소리를 내서 두더지 영감들이 귀가 따가워서라도 떠나가기를 바랬지만 소용없었다. 더구나 두더지굴로 빗물이 흘러 축대마저 물러나 앉아, 아래 텃밭에서 일하다 어느 날엔가 바윗돌이 굴러내리는 상상을 하지만 진이아빠도 보스코도 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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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밀린 마당잔디밭(잔디밭이라기보다 잡초밭) 지심매는 일로 오늘 아침을 시작했다. 보스코는 괭이로 뿌리가 깊은 민들레, 망춧대, 황새냉이, 쑥을 찍어냈고, 나와 드물댁은 냉이, 질경이, 고들빼기, 크로바, 명아주, 바랭이, 비름 등 잡초를 캐냈다드물댁에게 '아홉씨!'라고 핸폰이 소리 지르면 올라오라 했더니, 9시 정각에 우리 2층 문 앞에 서 있다. .


오전 11시에 찹쌀떡과 두유로 간식을 하고 점심은 엄천식당에 가서 먹었다. 동네 일꾼들이 다 모여드는 함바집이다그렇다, 나도 오늘은 일꾼이다. 오늘은 10시간 이나 일했는데도 임금은 체불이다. 보스코 말로는 "전순란은 노동자나 피고용인이 아니고 고용주다." "그럼 고용주는 누가 돈을 주느냐?" "주는 사람 없는 게 고용주의 특징이다. 아니, 고용주의 특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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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늘 함께 일을 하다가 내가 한 달 만에 서울서 내려왔는데도 한 주간 다 되어어도 자길 부르지 않으니 궁금해서 우리집 주변을 오르내리며 집안을 들여다 보곤 했었다. 저온냉장고 설치와 정리로 일주일을 보낸 탓이다. 정리 작업이라는 게 혼자 천천히 해야지 누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스코가 돕겠다 해도 "당신, 제발 얼씬거리지 말고 숨만 쉬고 있어요." 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오후에 보스코는 예초기를 마저 돌리고, 해거름까지 배나무에 소독을 했다. 꽃 피기 전 소독을 걸러서 평소보다 더 철저하게 분무기를 뿌렸다. 시골에 살며 자연을 누리고 사는 값을 톡톡히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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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칠 대로 지쳐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 바로 쉬자 했는데, 그는 다시 책상 앞에서 마감 넘긴 글을 쓰고, 나는 세탁기 돌리는 가사와 일기 쓰기가 기다린다. 이렇게 정신없이 살다 보면 늙을 새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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