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3년 3월 7일 화요일 맑음
월요일 아침. 박신부님은 우리집을 ‘수도원’이라고 했다. ‘조용히 침묵 속에 각자 필요한 일을 한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평화로움이 있다.’ ‘그래서 아주 편하다.’고 했다. 누가 우리집에 와서 자기 집처럼 편하다면 최고의 칭찬이겠다.
아침을 맛있게 들고, 동네 한 바퀴 산보를 하고, 10시 30분에는 미사를 집전했다. 위아랫동네 사는 소담정 도메니카와 체칠리아도 미사에 함께했다. 사제는 미사성제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고 힘을 얻는다고 했다. 미사 지향은 ‘지리산 케이불카 설치 반대’, ‘산악열차 반대’, ‘지리산 댐 건설 반대’에 두었다.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고 욕심부리지 말고 갈 수 없는 사람은 바라보는 것으로 자족하는 삶을 살자는 얘기였다. 모든 것을 다 돈과 연계시켜 돈 되는 일이라면 눈이 벌건 그런 사람은 되지 말자는 얘기.
며칠 전 보스코와 산보 할 때, 예전에 지리산댐 뚝이 설 곳이라고 했던 자리 도로에 새로 칠한 붉은 페인트 자국을 본 그가 얼마나 긴장을 하던지! 우리가 이 땅을 얼마나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지 새삼 느꼈다. 그러니 매일 그런 일들과 싸우느라, 삼척 일대 핵발전소 반대로 길거리에서 살다 시피하는 신부님의 눈에는 얼마나 모든 게 더 절실해 보일까!
우리집에서 신부님이 쉬신 방은 집 전체의 보일러 파이프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곳이라 좀 덥다. 나도 웬만큼 더운 곳을 좋아하지만 내가 그 방에서 못 잘 정도다. 그런데 신부님은 너무 추위에 떨어 온 터라 더운 줄 모르겠고 되레 몸이 풀린다고 하니, 그 많은 시위를 벌이면서 얼마나 길바닥에서 덜덜 떨어오고 얼마나 몸이 얼었을까 새삼 알겠고 새삼 존경이 간다.
도미니카, 체칠리아랑 함께 점심을 먹으며 박신부님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제 월요일엔 무주 최종수신부님께 들르러 간다며 길을 떠났다. 그곳에 5시에 도착하기로 약속하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신부님은 차 키를 못 찾아 무려 30분을 헤맸다. ‘정말 남자들은 미혼자나 기혼자나 여자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 '반쪽 짜리' 인류의 기능을 우리 여자들은 mono-functional이라고 부른다. 물론 우린 multi-functional이고)인데도, 교회가 억지로 혼자 살라고 하니 저런 사단이 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신부님은 입고 있던 바지 주머니에서 차 키를 찾아냈다! (‘성모님, 성모님이 건사하실 아들들 정말 엄청 많으시네요!’).
우리 막내동서네는 건강을 챙기는 운동 기구가 많고 갈 때마다 업그레이드 된 최신 운동 기구를 갖추고 있어 촌사람인 나는 이것 저것 해보고 그때마다 감탄을 했다. 그중에 오래되어 안 쓰는 실내 자전거가 있는데 필요하면 우리더러 가져가라기에, ‘탑차 택배’를 하는 막내 동생 호연이가 함양 수동으로 물건을 배달하는 길에 어제 송탄에 있는 동서네 집에 들러 자전거를 해체하여 휴천재까지 싣고 왔다.
‘새 것도 얼마 안 주면 사는데 누나는 헌 물건이 그렇게 좋아?’ 라며 핀잔도 하고... 나야 그런 핀잔이 상관없다, 못 쓴다는 물건의 생명을 연장해주는 일이니까! 옛날 사람, 낡은 사람이어선지 옛 것, 헌 것이 나는 편하고 익숙하다.
엊저녁. 막내 호연이는 자전거를 실어와 능숙하게 재조립하고 저녁을 맛있게 먹고는 집이 떠나가게 코를 골며 잠나라로 떠났다. 오늘 아침 7시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이번에는 거창에 가서 물건을 싣고서 서울로 간단다. ‘떠돌이 나그네 인생이 내 취향에 맞는다’니 사람은 모두 다르다.
손님이 와서 평상의 리듬을 놓치면 보스코는 좀 피곤해 한다. 온종일 조용히, 침묵 속에, 번역 일만 하다 보니 밖에 나가거나, 집에서도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는 일이 힘든가 보다. 사람들을 만나도 그는 주로 듣는 편. 그래서 유난히 말 많은 사람들을 힘들어 한다.
오늘은 휴천재 이층 벽돌방에서 겨울을 난 화분들이 바깥으로 내려와 내가 손을 보아 데크밑 화단에 놓아 여름을 지내게 배치하고, 소담정에서 국화를 얻어다 길가에 심었다. 식당채 앞 화단에는 그집 텃밭에서 캐온 제비꽃(바이올렛)을 가득 심었다. 아직 제법 쌀쌀한 날이 이어지지만 봄은 엄연히 봄이다.
드물댁이 감자씨 눈을 따 준다고 올라왔는데, 비싼 씨감자를 쥐들이 겨우내 절반은 먹어 치웠다. 일대를 배회하는 고양이는 간간이 내가 주는 밥만 먹고 쥐 잡는 본분은 안 했으니 내일부터 국물도 없다! (고양이의 항변: "꽉 닫힌 보일러실 감자 박스에 숨어서 먹고 싸는 놈까지 내가 어케 책임진단 말인가요, 먹이라고는 쥐똥만큼 주면서?") 요행히 작년에 텃밭에서 거둔 감자가 남아 있어 심기에는 충분하다. 까딱했다간 “씨종자도 안 남기고 싹 다 먹어버린 여자”(농사짓는 여인들에게 가장 심한 욕)가 될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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